피터 일스테드(Peter Vilhelm llsted·1861 - 1933). A Woman Knitting by a Window. 1902. <출처: pinterest>
두어 달 전 보낸 원고 초교 일부를 받았다. 출간 일이 코앞이라 서둘러 교정봐야 예정일을 맞출 수 있다. 한데 이삼일 간 눙쳤다.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각설하고,
들어가는 말을 읽는 데 떨렸다. 무슨 대단한 원고라고 가슴이 뛰는지 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자뻑이라고 핀잔주겠지만 사실인 걸 어쩌란 말인가. 여하튼 간에 자뻑이고 감동이고 간에 얼른 초교 교정본을 보내는 일이 지금 할 일이다.
원고를 한 창 쓰던 때 글맛이 좀처럼 돋지 않고 읽을 때마다 웅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 여러 번 있었다. 몇 번 다시 읽어도 주저앉는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기분 탓으로 돌려도 봤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의'라는 글자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과정으로'라는 문장에는 '사고'와 '과정'을 '의'라는 낱말로 잇고 있다. 이는 일본어식 표현이다. 여기서 '의'는 일본어 '노(の)'이다. 일본어는 명사와 명사를 연결할 때 이 '노(の)'를 꼭 쓴다. 이 쓰임이 그대로 우리글에 자리매김 한 것이다. 우리말은 일본어처럼 '의'를 남발하는 수준으로 쓰지 않는다고 정혁준 이코노미인사이트 편집장은 주장한다.
'의'를 빼고 문장을 다시 썼다.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 과정으로', 몇 번이고 문장을 읽어도 푹 꺼지는 느낌 없이 매끄럽게 질주한다. '문제 정의의 기술'이 아니고 '문제 정의 기술' 역시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일본어 ‘~와의’(~との)를 가져다 쓴 제목이라고 한다. 우리말은 조사 '와'와 '의'를 겹쳐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에의' '에서의' '과의' '으로서의' 모두 일본어식 표현이다. 문장에서 '의'를 걷어내는 노력을 들이면 펄떡펄떡 뛰는 생동감 있는 문장력을 가질 수 있다.
교정 분량이 꽤 남아 있다. '의'라는 글자 쓰임을 안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특히 글맛이 푹푹 꺼지는 현상을 경험한 나로서는 시간이 두 배 남짓 걸릴지라도 '의' 만큼은 잡아야겠다. 투지를 다지니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 같다. 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