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Vilhelm llsted(1861 - 1933). Girl Reading. 1901. <출처: flickr>
요즘 나는 팔랑귀다. 12월 출간을 앞두고 제목 짓는 일 때문이다. 지난 문제해결 연구 모임 때는 캐주얼 하나마 설문도 하고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도 했다. 나를 잘 모르는 집단은 긴 제목을 선호했고, 제법 나와 호흡을 맞췄던 이들은 짧은 제목을 추천했다. 결과는 오리무중이었지만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긴 제목을 선호한 사람 특징은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최근 핫한 책 제목 하나를 거론하며 ‘내 얘기잖아!’ 한다. 그가 거론한 책 제목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이다. 죽고 싶을 만큼 현실은 고되지만 먹고 싶은 욕망만큼은 이루고 싶다 쯤 되는 듯싶었다. 밤을 하얗게 새도 이 감성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타박도 받았다. 바로 이 점이 밀레니얼일까. 순간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를 보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따라가지도 못할 그 감각 저변을 차지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골몰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귀동냥도 얻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 ‘월 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을 끌어낸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저서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한 문장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산문적인 삶 보다 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요컨대 산문적 삶은 현재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고, 강압과 의무만이 존재하는 합리를 우선하는 계량화 한 사회를 말한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은 공동체를 잊는다. 오로지 각자도생이 자기를 지킨다는 것이다. 반면에 시적인 삶은 사랑, 우정, 춤, 축제, 놀이, 공동체를 돌보는 삶이다. 이 산문과 시가 조화를 이루는 삶이 자기 삶을 제대로 충만감 있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긴 제목에 유난히 눈길이 머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몸부림을 쳐 떨어내고 싶은 경쟁. 하지만 피할 재간이 마뜩지 않은 아찔한 심경이 긴 제목 한 문장을 읽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여태 몰랐던 것이다. 떡볶이 한 낱말로도 충분히 위무할 수 있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힘겨움을 나는 무관심한 것이다.
탐이 나는 긴 제목을 쓸 수 있을까. 이번 책 내용이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 주기보다는 일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 잘하는 비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피터 일스테드(Peter Vilhelm llsted, 1861 - 1933) 작품 '책 읽는 소녀'(Girl Reading·1901) 그림이 선사하는 고요함을 선사하고 싶다. 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