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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11. 2024

드디어, 소년이 온다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과 '소년이 온다'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나의 단일한 에세이집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에는 ‘1980년 5월 18일과 광주와 나’라는 글이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처음 읽었을 때 다시 한번 내가 마주했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그 벽을 떠올렸다. 마음속에 서리가 앉았다가 천불이 일었다가 죄다 증발했다가 이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 책장의 끝에 다다르니 재 같은 감상이 마음 아래 수북했다. 시리게 얼어붙은 결정이 끝내 뜨겁게 타버린 재의 형상으로 흩날릴 거 같아 무엇이라도 써야 할 거 같았다. 누군가에겐 이 소설이 그 벽을 마주하는 듯한 체험일 것만 같았다. 물론 그저 끔찍하게 과장된 비극적 허구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든, 심장이든, 어딘가 잘못된 이가 아니라면 그런 엇나간 감상을 품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만약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나 광주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보았다. 총을 메고 누군가를 대신해 내 목숨을 바쳐 순수한 양심을 헌화할 것이라 다짐할 수 있었을까. 나의 양심은 과연 광주에, 전남도청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무자비한 권력의 야욕으로 짓뭉개진 얼굴의 반석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살고 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그 무력감과 비루함을 연신 체감하고 되삼켰다."

처음부터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이라는 제목부터 지은, 이 책을 쓰게 됐을 때부터 나는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만큼은 꼭 쓸 거라 생각했다.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광주에서 매년 5월에 보고, 느낀 바에 대해서 꼭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담고 있는 그 모든 창작물 안에서 가장 비범하고 뜨겁고 서늘하며 처연한 작품이었다. 처음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마음 속에 천불이 일면서도 서리가 내리는 듯한 그 기분이 여전하다. 그래서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이야기하는 이상 <소년이 온다>를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제주 4·3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작별하지 않는다>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내 책과 이 글에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무 기뻤다. 물론 한국의 다른 작가가 수상했다 해도 놀랍고 대단하다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기뻤을까. 그렇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에 걸린 명예를 생각한다. 나는 늘 1980년 5월 18일의 광주가 더 이상 아픔이나 통증이라는 단어로 명명되는 것을 넘어 명예와 영광의 수사를 두르는 날을 꿈꿨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유년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인식과 보다 올바른 평가까진 다다랐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인식과 평가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이 온다>는 굉장한 위로와 용기를 주는 방패였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여전한 시대의 아픔을 함께 앓아주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인류애가 조금 늘어나는 기분을 느낀다. 정말 너무 기쁘다.

문득 생각해보았다. 천인공노라는 단어가 아까운, 몇 해전에 팔자 좋게 세상을 떠나버린 전두환 씨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당사자가 반성하거나 뉘우칠 것이라는 기대 따윈 품지도 않고,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다. 다만 세상이 그 이름에 명예나 존경 같은 단어를 동원하며 단어의 품격을 망치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무덤에 침을 뱉어주길 바란다. 망자가 됐다 해도 떨어뜨릴 것은 한없이 떨어뜨려야 하므로. 결국 기억하면 실패고 잊으면 성공일 것인 그 치욕스러운 야욕 앞에 망각함으로써 처절히 패배할 수는 없는 법이므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나는 정말 진심으로 기쁘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가 비로소 뜨겁게 웃는 것만 같다.

소년이 온다. 정말, 마침내.

역사란 이토록 더디다 하여도 끝내.

정말 멋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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