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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호든, 불호든, 어쩔 수가 없다

보고 나면 말하기를 중단할 수 없는 영화 <어절수가없다>에 관하여.

by 민용준

“그래, 와라. 가을아.” 만수(이병헌)는 “다 이뤘다”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낡은 집을 매입해 새 집으로 만들었고, 덕분에 갖게 된 너른 마당에서 가족들에게 먹일 장어를 굽고 있다. “당신 좋아하나 봐”라는 아내 미리(손예진)의 말처럼 회사가 자신을 신뢰하는지 장어를 다 보내준 덕분이다. 제지회사에 바친 25년의 세월이 무색하지 않다. 않을 줄 알았다. 장어는 통보였다. 미국 기업에 인수된 회사는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만수는 해고된다.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도끼질당했고,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모가지가 잘렸다. 회사는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만수도 어쩔 수가 없다. 새로운 구직 면접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힘든 면접을 봐야 한다.

박찬욱 감독의 12번째 장편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이 스스로 수차례 피력한 것처럼 그의 일생일대 프로젝트였다. 20여 년 전 영화화를 위해 소설의 판권을 확보했고, 국내에 출간된 판본에는 직접 추천 평까지 쓸 정도로 애착이 강했다. 영화화 판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박찬욱 감독보다 일찍이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2005)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프랑스 거장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도움을 얻었고, <어쩔수가없다>의 엔드 크레딧에는 그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헌사가 명기돼 있다. 다만 20여 년이나 기다려야 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일찍이 미국영화로 제작이 가시화됐으나 투자 문제로 무산된 이후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한국영화로 제작될 기회가 찾아왔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배우 이병헌과 작품으로 25년 만에 재회하는 장편영화이기도 하다.


<액스>는 제지회사에 다니다가 해고된 남자 버크가 자신의 재취업 경쟁자가 될만한 이들을 색출해 미리 제거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소설이다. 이를 영화화한 <어쩔수가없다> 역시 재취업 성공을 위해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남자 만수를 주인공으로 두고 있다. <액스>의 버크처럼 살인을 저지르며 종종 죄책감을 느끼지만 끝내 계획을 완수하는 만수는 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자신이 해고되는 바람에 다 이루었던 가족의 행복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편 원작의 버크와 달리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집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폐가’나 다름없던 집을 매입해서 ‘올수리’한 이유는 그곳이 ‘어릴 적 추억’이 담긴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쩌면 집을 지키기 위해서 만수는 끝내 어쩔 수가 없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어쩔 수가 없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을 선택을 하는 셈이다. 박찬욱 감독은 만수의 선택이 끝내 ‘헛수고’라고 설명한다. 물론 만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피에 환장하는 살인마가 아닌 그에게 살인할 결심이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정말 힘든 면접’이다. 게다가 그가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대부분 회사에서 모가지 잘린 이들이다. 덕분에 만수는 자신이 죽여야 하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종종 진솔하게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내가 무능력한 자신 대신 젊고 유능한 남자와 외도하지 않을까 의심이 깃들고, 아내의 합리적인 제안에 따르지 않는 상대의 어리석음을 논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불합리한 선택의 이유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동시에 어린 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고심 끝에 시원하게 원샷을 때리며 금주의 갈증을 해소하기도 한다.


만수는 경쟁자를 제거해야 다시 제지회사에 취업할 수 있고, 그것이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하나씩 실행될수록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족은 그가 바라던 어제와 동떨어진 내일로 밀려간다. <어쩔수가없다>는 결국 가족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부부 관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식구들 입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고 그러니 거듭나야 한다고 다짐하는 만수는 25년간 종이밥을 먹었기 때문에 제지회사를 다니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그의 결심은 끝내 가족의 마음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휘게 만드는 뜻밖의 완력이 되고 만다. 식구들 입에 밥은 넣어줄 수 있게 됐지만 함께 추고자 했던 춤은 더 이상 출 수 없게 됐고, 영원히 비밀을 묻어야 하는 공범이 되어 함께 불온해진다.

<어쩔수가없다>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각기 다른 네 사람의 입으로, 역시 각기 다른 형태로 발음된다. 언어의 형태는 유사하지만 그 유사한 형태에 얽힌 처지와 사정은 각기 다르다. 그러니까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어쩔 수가 없다고 믿기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짐하듯 읊거나 확신하듯 뱉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게 다짐하거나 확신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쩔수가없다>는 믿어야 하기에 빠지는 지옥이 아니라 믿어야 한다고 다짐하는 자가 스스로 뛰어드는 지옥에 관한 캐리커처 같은 영화인 셈이다. 리얼리티만큼이나 아이러니를 강화하기 위해 비틀고 비꼬는 은유와 과잉의 메타포를 즐기는 흥미가 다분하다.


어쩌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감상을 피력하도록 부추기는 힘일지도 모른다. 호든, 불호든,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박찬욱이라는 거장의 저력이자 그의 영화가 가진 위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발간하는 'The-K 매거진' 11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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