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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 정남씨

필립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고

by 조승희 Mar 17. 2025

 돈, 남편, 자식. 정남씨는 이 애물단지 같은 것들에 발목을 잡힌 채 76년째 살고 있다. 오빠 한 명, 언니 한 명, 아래로 남동생 두 명, 그 외 죽은 형제들. 고성 동해면, 가난한 농사꾼의 둘째딸로 태어났으니 순탄한 시작은 아니었다. 정남씨는 학교 문턱을 밟지 못했다. 그래서 겁이 많았다. 혼자 은행에 갈 수 있는 사람이 평생 부러웠다. 청상과부나 다름 없던 젊은 시절 자신을 아껴주는 한 남자를 만났다. 비밀유지가 관건인 사랑. 한 동네에 살던 두 사람이 굳이 한 시간 넘게 각자 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의 여관에서 접선하듯 만났다. 뜻하지 않게 외박을 하게 된 후 아들이 눈치 챌까 두려워 이별을 선고했다. 여담이지만, 혼자 낯선 동네의 여관을 찾는 것이 자식 몰래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만큼이나 정남씨에겐 어려운 미션이었다고 한다.

 

 정남씨는 입가의 주름과 처진 눈 때문에 웃지 않으면 근심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내 코를 닦아주고 있는 사진 속 젊은 정남씨는 고왔다. 형편이 어려울 때도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나누어 주길 좋아하던 정남씨. 올 때마다 용돈을 손에 쥐어주던 정남씨. 순박한 심성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환히 웃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하지만 키가 작고 코가 낮으며 쌍꺼풀 수술을 하기 전인 정남씨는 예쁘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을 생김새였다. 그에 비해 정남씨가 중매로 만난 여섯 살 연상의 해봉씨는 큰 키와 남자다운 체격으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진부한 일일연속극 에피소드 몇 개를 실제로 재현할 정도로 해봉씨의 여성편력은 화려했다. 덕분에 정남씨에게도 바람난 남편의 상대를 찾아가 물건을 부수고 머리채를 잡는 여자역이 맡겨졌다. 때리는 사람이 더 벌벌 떨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해봉씨가 가구, 가전마저 똑같이 해놓고 두 집 살림을 살고 있었단 것이 밝혀지자 이번엔 정남씨의 남자형제들과 그 아내들이 함께 나섰다.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해봉씨는 내연녀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정남씨는 큰오빠네 집 살림을 봐주는 가정부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매일 쓸고 닦느라 무릎과 팔목 관절이 너덜너덜해졌다. 정남씨에게도 낙은 있었다. 2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 적금 통장 몇 개도 손에 쥐었고 30평대 아파트도 장만했다. 다정한 큰 아들도 은행에 취직을 했고 과묵한 둘째 아들 식당도 호황이었다. 짧은 호시절이었다.


 정남씨의 아버지는 정남씨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성공한 큰 아들이 집을 사라고 돈을 부쳐주었는데 은행에서 돈 뭉치를 찾아 가슴에 품고 온 다음날이었다. 심장마비였다. 돈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의 딸이었다. 먹고 살 걱정을 잊을 즈음, 은행에 다니던 큰아들이 사고를 쳤다. 주식을 하다 은행돈을 횡령한 것이었다. 빵에 다녀온 후 식당을 해서 돈을 제법 벌었지만 주식으로 또 빚을 지기 일쑤였다. 참하고 성실하던 첫째 아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다들 자꾸만 정남 씨에게 손을 벌리며 변해가는 그가 동일인임을 믿을 수 없어했다. 잘 되던 김밥집을 접고 고기집을 연 둘째 아들의 장사도 신통치 않았다. 덩치가 큰 가게라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정남씨는 써보지도 못한 통장을 또 내놓아야했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자식들과도 소원해질 무렵 바람처럼 사라졌던 해봉씨가 30여 년 만에 돌아왔다. 월남 파병군인으로 받는 월 200의 연금과 선장 월급4-500. 절대 받아주지 않을 것처럼 굴던 아들들이 먼저 마음을 열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두세 달에 한 번 씩 들어왔기에 정남씨도 참을 만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해봉씨는 바람둥이가 대체로 그러하듯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정남씨를 위해 집을 수리하고 냉장고를 바꾸어주었으며 맛있는 것을 사 먹이고 '내 돈도 네가 다 관리해라'며 선심을 썼다.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후 평생 잊지 않을 거라며 소리를 질렀던 해봉씨는 분기별로 정남씨의 동생네 부부를 불러 밥도 사고 용돈도 건넸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은 해봉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해봉씨의 개 같은 버릇은 정말 여든까지 계속 되었다. 여자 친구가 해다 준 반찬 그릇을 정남씨네 집으로 가지고 왔고 정남씨가 외출한 틈을 타 여자 친구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들키는 재주까지 있었다. 정남씨는 그 때 마다‘이제 더는 못 살겠다며’눈물을 흘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도 이제는 해봉씨 새 여자 친구의 신상은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정말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게 가능하나?”

한동안 입방아를 찢었고 '그런 일이 있었지'란 일들로 남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해봉씨는 팔십이 되었다. 여자 친구가 삼천 만원을 빌려달라고 하여 적금을 깨서 돈을 주었다. 그 다음 날 여자 친구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일로 해봉씨는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5개의 스탠트를 가슴에 박았다.


 팔십 하나가 되던 해에 위암판정을 받았다. 팔십 둘에 스텐트 하나가 손상되었다. 해봉씨 심장에 스텐트가 여섯 개로 늘었다. 해봉씨 역시 '몸의 붕괴를 막기 위해 고안된 인공장치들의 창고'로 바뀌고 있었다. 입원 중 합병증이 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해봉씨 없으면 혼자 어떻게 사느냐고 울던 정남씨.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병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봉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정남씨는 성한 관절이라고 없는 고령의 약자임을 내세워 은근히 간병을 거부했다. 해봉씨는 절대 요양병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정남씨에게 욕을 해대고 난리를 쳤지만 가족들 대세에 따라 병원으로 옮겨졌다. 일주일에 한 번 아들이 문병을 갈 때면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라고 병실이 따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병세는 차츰 회복되었고 성격은 사나워졌다.

"아버지 저기 있다가는 더 큰일 나겠다, 엄마가 좀 참으소."

아들은 자기 집이 아닌 정남씨네 집으로 해봉씨를 데려왔다.


해봉씨의 퇴원을 축하할 겸 정남씨를 위로하기 위해 정남씨네 집을 찾았다. 해봉씨는 많이 여위어 도움이 필요해보이긴 했지만 다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닭고기도 푹 고와서 살만 발라 먹이고……."

해봉씨 누이들이 병자에게 해 먹이라고 했다는 것들을 열거하며 정남씨는 처진 눈을 찡긋하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남씨와 해봉씨의 이야기는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와 성찰, 노년의 고독과 통증을 다룬 필립로스의 소설 <에브리맨>과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다른 변주곡이었다. 정남씨와 해봉씨는 만수산 드렁칡처럼 엉켜서 살아가고 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주인공이 좌우명처럼 여겼던 말을 정남씨도 매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 이판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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