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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라르 Jan 22. 2024

양심과 죄책감

법이 가지지 못한 개인의 힘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는 40대 중반의 남성이지만, 10대 소녀 롤리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롤리타를 곁에 두기 위해 롤리타의 어머니인 샬롯과 결혼하지만, 당연히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계략 중 하나였을 뿐이다. 진실된 마음은 영원히 숨길 수 없는 것인지, 험버트의 마음을 알게 된 샬롯은 괴로움에 집을 뛰쳐나오고 결국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이후 험버트는 어머니를 잃은 롤리타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단 둘이서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소설이 이어진다. 물론 여행 중에도 부절적한 관계는 계속된다. 


 험버트는 작품 속에서 10대 소녀를 사랑했던 자기를 다양한 주장을 하며 변호한다. 먼저 성인을 결정하는 법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의 법에 따르면 롤리타는 성인이 될 수 있지만, 롤리타가 태어난 곳의 법에 따르면 아직 성인이 아니게 된다. 겨우 몇 km만으로 성인이 되거나 아니게 된다는 게 기준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법적 나이로 험버트를 탓할 수 있을까? 이렇게 허점이 많은 법이라면 어떻게 성인과 소녀를 나눌 수 있을까? 겨우 몇 개월 차이로 가능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주장은 롤리타가 먼저 유혹을 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롤리타가 유혹하는 장면이 많았다. 롤리타는 돈을 얻기 위해 성적인 행동을 보일 때도 있고, 먼저 키스하기도 한다. 세 번째 주장은 롤리타를 향한 마음은 더러운 욕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라서니, 고귀하고 숭고한 마음과 연결된다는 뜻이다. 사랑이 어째서 나이에 귀속될까. 세간에서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라 쉽게 떠들지만, 왜 이럴 때는 나이를 들이 된다는 말인가.


 험버트의 행동은 소설은 불쾌의 연속이지만, 독자의 시선이 실속 없는 감정만 있다는 듯 허점을 파고들어 설득한다. 독자는 반박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고 감정만 내세우는 모순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는 험버트의 논리를 반박하기보다 좀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바로 '<롤리타>를 보고 왜 불쾌함을 느낄까?' 그리고 '우리는 왜 험버트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어른은 아이를 보호해야 할 존재다. 험버트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게 이유다. 적어도 이런 불쾌감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러나 험버트는 아이를 상대로 욕정 하며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를 법의 잣대나 개인의 순수성으로 설명하면 우리가 느끼는 불쾌함을 해소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 쓰레기를 버린다고 법으로 처벌할 수 없듯이 오직 개인의 양심이 움직여야 한다. 소설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은 없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합리화를 통해 독자를 흔들 뿐이다. 험버트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어린 소녀에 대한 욕정을 느끼고 거기에 죄책감을 느껴 멀리 하였다면 인간적이면서 양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이였다.


 양심은 나쁘다고 생각되는 길을 가지 않도록 이끄는 마음의 이정표이지만, 유혹에 쉽게 무너진다. 양심의 속성이 이러하다. 내 하나 지키더라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무력한 양심이기도 하고, 때로는 양심을 지키느라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사람에게 양심을 지키라 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일 수도 있다. 사회는 양심을 지키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법이 그 역할을 도와주고 있다. 나쁜 길을 가지 않도록 이끈 이정표가 양심이라면, 죄책감은 이미 지난 길에서 느끼는 불편한 마음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갈 수 있는 죄책감이야말로 인간적이다. 안 겪을 수 있는 실수를 굳이 겪어보고 생기는 마음이라니. 죄책감에 잘못 빠지면 심한 자기 환멸을 할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저주를 퍼부을 수도 있지만, 나는 좋은 의미로 좋아한다. 존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저서 <자유론>에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까닭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태도에 있다'


 죄책감 없는 양심은 단단한 양심보다 선입견이라던가, 교육받은 주입식 양심에 가깝다. 이런 양심일수록 내실이 부실하여 유혹에 쉽게 무너진다. 단단해 보이더라도 그럴 상황을 격지 못하여 그리 보일 뿐이다. 죄책감을 얼마나 올바르게 해석해 왔냐에 따라 양심은 단단해질 수 있다. 그만큼 자기가 어디에 불편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정의감보다 현실적이다. 어떤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기도 좋다. 어째서인지 좋은 말과 좋은 행동만 보여주는 사람보다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다.


 양심과 죄책감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양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웅숭깊은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부끄럽다.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당연히 못 한다. 이런 내가 <롤리타>를 읽으며 양심과 죄책감에 대해 생각하고 사람이 될 기회를 조금은 얻은 것 같다. 험버트처럼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린 소녀를 이용하고, 진실을 교묘하게 비틀어 주변을 혼란스럽게 하는 모습은 불편했다. 험버트는 자기 욕망을 인정하기 위해 원래부터 어린 소녀'만' 좋아하는 것처럼 꾸민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양심과 죄책감이 없다면 진실은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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