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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라르 Feb 05. 2024

완벽주의자의 자부심

자부심과 수치심의 불협화음

 어릴 적엔 많은 집에 위인전 모음집이 있었다. 나 또한 위인전을 읽었고(지금은 없다) 이순신, 세종대왕, 아인슈타인, 간디와 같은 위인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뛰게 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질문에 그들을 생각하며 답한 적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을 동경했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감정을 느끼긴 어렵다. 그때처럼 가슴이 뜨겁지 않다. 나는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꿈을 배신한 수치심은 아닌 것 같고, 그 시절과 지금 나의 모습사이에서 오는 비루함은 얼추 맞는 것 같지만, 동경의 뜨거움만으로는 계속 달릴 수 없는 정신이 된 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어떤 대단한 사람의 성공스토리는 이제 거부감마저 생겼다. 


  성인이 되어도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완벽주의자 또는 요즘 말로는 육각형인간이라 했던가. 완벽주의에 가까웠던 까닭에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나를 인정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하면 이미 대단한 사람이 된 것 마냥 착각이 들기도 했다. 회사 일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 공부했고, 주말은 오로지 발전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했다. 이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불편한 일을 적당한 환기 없이 지속하면 마음이 가난해져서 문제가 된다. 회사 점심시간을 쪼개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한심스럽게 보았다. 어쩌다 한 번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매일 이 생각이 쌓이면 걷잡을 수 없이 혐오감도 쌓인다. 내게 아무런 악의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런 혐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별의별 이유로 생겼다. 해외로 여행 가는 이를 보면, '돈 걱정도 안 하나?', '나는 지금 열심히 해서 돈을 모으고 발전할 건데, 저놈은 미래에 대해 별 생각이 없나?'라는 생각을 했다. 여행 갈 이유보다 여행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타인을 낮추고 나를 높였다. 내가 타인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랬다. 내가 잘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사나운 마음만 키웠었다.

 

 나는 당시 내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다. 자부심은 어떤 일에 가치를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다.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이 즐겁다. 자부심은 동기를 부여하여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며, 나쁜 길의 유혹에도 옳은 길을 선택한 자에게 양심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도운다. 따라서 올바른 자부심은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도록 하는 등대다. 하지만 내 자부심은 오만을 만들고 편견으로 사람을 대했으니 결코 건강하지 않았다.


 자부심은 때로 수치심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일 했을 때 자부심을 느낀다면, 그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수치심을 느끼기 쉽다. 수치심은 당당하지 않는 마음, 또는 부끄러운 마음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굳이 쓰레기통을 찾는 수고를 할 때 자부심은 수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고, 수치심은 이 수고를 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수치심이 없으면 자부심도 생기기 어렵고, 자부심이 없으면 수치심도 생기기 어렵다.


 동기적인 측면에서 수치심은 자부심보다 강하고 빈번하다. 사람들 앞에서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은 시선을 받기는 어렵지만, 길가에 함부로 버린다면 쉽게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옳은 일은 하기 싫고, 나쁜 일을 조롱하기는 즐겁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아직 내 마음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틀림이 없다) 보상보다 처벌로 사람을 통제하거나 움직이게 한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아마 사람은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에 긴밀히 움직이는 듯하다. 수치심을 잘 활용하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나아지는데 도움을 주는 이로운 감정이기도 하다. 자부심이 수치심보다 더 동기부여가 잘된다고 해서 수치심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잘못된 행동을 하고 불편을 느낀다는 점에서 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수치심이 부정적 감정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치심도 장점이 있다. 수치심이 문제가 수치침을 외면하는 데 있다. 수치심과 같이 불쾌한 감정들(예를 들면 시기, 질투)을 외면하면 기분은 여전히 불쾌하게 남아있다. 이 기분은 내가 해결하지 않으니, 남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까닭에 타인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새로 집을 산 친구의 집들이에 가서 괜히 '이 집 월세지?', '대출을 얼마나 받았어?'라고 간접적 공격이 되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 나를 심판하는 경멸의 눈빛에도 '내가 버리니 환경미화원이 먹고사는 거야' 말하며 합리화를 위해 양심까지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나는 확실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수치스러워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불편을 느꼈겠지. 내 수치심을 외면한 대가는 타인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혐오였다. 혐오는 강해지는 속성을 지녔는데,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부끄러운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하면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구나'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악의가 있거나, 게으른 사람이니 그렇게 살 거야'가 아니라 '나는 악의를 품거나, 게으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다'으로 생각이 이어져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힘을 키웠다. 수치를 느껴 남을 비난할 수 있어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다. 어릴 적 어른들은 위인이나 대단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당연시 말했다. 이런 말투를 당연히 겪다 보면 위인같이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동경하고, 그들처럼 되겠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자부심에 따라올 수치심을 해석할 기회는 당연히 되지 않았다. 내가 반성하는 시기는 온갖 부끄러운 생각을 가지고 난 후였다.


 요즘은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이와 같은 '보통'의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오히려 자신감과 여유를 만든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계와 불안정을 인정하고 나서야 특별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자부심이 수치심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건강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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