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어있던 딸아이의 집. 내가 들어섰을 때, 첫 마주침은 고독이었다. 고양이처럼 고독은 빈집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홀로 윙윙대는꿀벌같이 팅 빈 집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는 ..., 이쪽 강가에 서 있는 그녀와 강 너머의 강둑에서 기다리는 어느 한 사람. 그러나 만날 수 없어 이분된 채, 한 사람씩 빈집을 지켜야 할 절대적 아우라.
퇴근 시간대에 혼자 사는 집안은 감감하다. 스위치에 손을 얹으면손끝으로 결핍의 추상들이 엉겨 붙는다. 외롭다. 쓸쓸하다. 빈한하다..., 겨울바람만큼 시린 가슴이다. 언 발 끝에 차인돌멩이만큼 딱딱한 심장이다. 잠 안 오는 밤이 이어진다. 그래서 가끔, 빈집을 지키던 그녀의 울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불을 켜면 바로 환해질 텐데,뇌관으로 조여드는 그 짧은 순간을, 끝나지 않을 긴 시간인 양 그 어둠이 세상의 전부인 양, 불 켜지기 전의 막막한 순간에 갇혀 그녀는 울고 있었다.
타인에게서
호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딸은 귀국하여 수원의 작은 아파트에혼자 살고 있다. 그녀는 옆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른다. 11개월 동안 우리 가족은 그녀와 그렇게 떨어져 살아왔다. 아직 학기가 남은 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나는 호주에 더 머물러야 했다.내가 그녀의 집에 처음 오던 날 빈집에서 마주친 고독은, 엄밀히말하면 그녀의 고독이 아니라 나의 고독이었다.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전, 내 안은 이미 그녀의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퇴근길겨울비를 만날 때 낡은 우산이라도 전해 줄 친지가 없을 그녀, 내딸.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집안의 적막.근 1년 동안 호주 브리즈번과 한국의 수원이라는, 먼 거리에서 걸려오던 가족의 전화 목소리는 부즉불리 - "떨어지지도않고 붙지도 않은 채' 그녀의 고독만 더 부추겼을 거라 단정했다.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신경을 조금만 건드려도 곧바로 울음이 나오듯, 그녀의 빈집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그녀의 고독이 내 혈관을 타고 급하게 번지고 있었다. 집을 출발할 때부터 고독의 칩을 내 심장에 장착하고 왔던 거다. 엄마니까.
고독의 오류를 깨치니
우리는 가끔 타인의 힘듦을 자신의 창으로 해석한다. 그것은오류를 동반하는데도 자신 있게 확신하며 당당하게 표현한다. 어려움 속에서 담담하게 살아가는 타인의 사생활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자의 소행이, 얼마나 큰 악행인지 모를 때가 많다. 귀국하여 그녀 집에서 그녀와 두 달을 거주했다.그간에 깨친 건, 느끼는 고독과 보이는 고독 사이의 갭 gap이다.타인의 고독이 무슨 색이며 어떤 질감인지, 또 타인의 행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듯이, 탯줄을 나눈 엄마라 해도 딸의 마음을소상하거나 적확히 짚어 낼 수는 없음을 알았다.
심중의 밑바닥으로 침전된 내 마음도 알지 못하면서 타인의 고독이 내 것과 동일할 거라는 판단은, 내 고독의 오류였다. 두 달간 지켜본 그녀의 고독, 그 너머에는 빛이 푸른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그녀는 전화선을 통해 마음의 일부만을 표현했으나, 나는 그 울음을 그녀의 전부인 양 그녀의 고독의 깊이를 내 방식으로 추정했고, 그것에다 어설픈 내 고독의 두께를 덧입혀왔다. 내 딸이라고,
고독은 유채색을 제 안에 감추고 있고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호곡장'에서 '1,200리의사방에 한점 산도 없고,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실로 꿰맨 듯하고, 비와 구름만 아득할 뿐이다. 이곳이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한다. 동행하던 정 진사가 왜 하필 이넓은 땅을 보고 울기 좋은 땅이라 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연암은"영웅은 잘 울었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라고 한다. 잘 울지 못하면영웅도 미인도 될 수 없다는 거다. 또 울음은 슬플 때만 우는 게아니라 기쁠 때도, 즐거울 때도, 사랑할 때도 운다는 걸 깨닫게 한다.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나는 슬픔만이 울음과 짝하지 않는다고 한 연암의 말에 자극받는다. 그렇다면 고독 또한 무조건 식은 커피 맛이거나 희끄무레한 무채색의 낙엽 같지만은 않다는 걷 깨우친다. 고독은 유채색을제 안에 감추고 있다.
고독에서 생명의 향기가 난다
그녀의 방 안에서 고독의 실마리를 풀 물건들을 만난다.무거움으로육중한 침묵이 아닌, 살아 있어 향기 가득한 고독을발견하였다.푸른 기를 아직 머금은 단풍잎 같은 고독이다. "죽은 물고기는 물살에 몸을 맡기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간다"는 말처럼, 물살을 거스르는 절대의 향기를 지닌 그녀의 고독.퇴근하면 바로 헤드셋을 쓰고서 디지털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거나, 천조각을 잇대어 예쁜 파우치를 만들거나, 치맛단을 잘라내어색다른 스커트를 연출한다. 화, 목 새벽 6시엔, 20분씩 전화영어를한다. 다른 새벽은 피트니스 클럽에서 몸매를 가꾼다.
가끔씩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하여 남자친구 사냥을 하기도하는 그녀는 이메일을 열어 미지의 남성이 보낸 프로필을 내게 보여준다. 그녀가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남성의 직업. 생김새.사는 곳...이 글로벌화되어있다. 나의 세대에서 접할 수 없었던낯섦이 신선함으로 다가오면서,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이제 곧한 개체와 한 개체로 분리될 수 있는 시간에 닿은 것 같다.
그녀의 빈집에서 처음 마주쳤던 고독은, 엄마로서 의고적인 마음이 작용했다는 것, 지금 그녀는 한 세대를 지나고 있는 통과의례의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젊은 피가 흐르는그녀 속엔 언제, 어떤 강이라도 건널 수 있는 돛배가 떠 있는 걸 확인하였다.
이형기 시인이 《돌의 환타지아》에서 '그것(돌)은 가장 견고한 감옥 / 갇혀 있는 수인은 바로 돌 자신'이라 했으나 그녀는 갇힌 돌이아니다. 견고한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어 두지 않는다. 흐르는 곳으로 흐르면 될 것을, 왜 하필이면 돌이 되어 자신에게 갇혀있는가. 아무리 굳건한 바윗덩이라도 빗방울에 홈이 파이고 정으로 쪼면 쪼개지면서, 갇혀있던 고독 사이로 오색의 빛이 들지 않는가, 한다.
나는 한 달 후 그녀를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데, 딸과 함께 살지못하여 메우지 못할 고독, 그 편편에서 피어날 또 다른 생명의 향을 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