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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Apr 25. 2023

물빛으로 시간을 읽다


공기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물은 엄마의 양수에서부터 나에게 안온과 유희를 제공했다. 10개월 동안 물속에 있다 나온 때문인지 무의식처럼 자주 갈증을 느낀다. 내 몸은 시시때때로 물을 요구한다.


  


유년의 물빛은 여러 장의 선명한 화면으로 있다.

집 옆 도랑은 나의 세면대이기도 했다. 옆집 할머니는 아침마다 도랑물에다 요강을 헹구었다. 고운 모래알을 넣어 짚수세미로 문지른 스텐 요강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물속까지 내려온 해님이 물빛을 바알갛게 물들일 때마다 내 마음은 왠지 모를 행복이 차오르곤 했다. 나는 할머니가 있던 자리에서 세수를 했는데, 요강을 씻었다고 께름칙하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순서였고 위에서 더 맑은 물이 내려왔으니까.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는 그곳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 가재와 송사리를 친구 삼아 데리고 놀았다. 맑은 물빛 바닥에는 조약돌이 재미나게 깔려 있었다. 해 질 녘에는 아버지의 물지게를 따라다녔다. 물동이 꼭대기에서 흘러내릴 듯 말 듯하면서도 시계추처럼 제 반경을 지키던 물방울의 율동은 하늘의 석양에 비치어 지상에 존재하는 별빛이었다.


 


 사춘기에는 파르라니 한 물빛으로 다가왔다.

자취 집 마당에 있는 펌프로 물을 자으면 지하 깊숙이 있던 물이 펌프의 압력을 받고 올라와 고무다라이에 떨어지면서 하얀 거품을 낸다. 그 물로 교복을 빨아야 했다. 하이타이를 물에 풀면 거품이 바글바글 새끼를 친 것처럼 세숫대야 가득 올라온다. 교복을 문지르는 게 아니라 자꾸 늘어나는 거품을 만지작대다 보면 어느새 교복은 세탁이 끝나 있었다. 좀 더 멋을 내어 입고 싶을 때는 물 한 대야에 청색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려 헹구었다. 교복은 ‘파르라니 한 화이트’로 변하여 괜스레 마음을 ‘봉글게’ 하였다. 파르라니 하게 물들인다는 것, 내 마음이 멍들어 간다는 무의식의 표출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맑은 멍이었다.


 


처녀 적 물빛은 커피색이다.

직장에 들어가서 나는 커피 타는 일이 본업인 양 물을 끓여서 커피를 타 댔다. 고위층에서 동네아저씨까지, 6년 동안 우리 사무실에 오는 사람은 거의 다 내가 탄 커피를 마시고 돌아갔다. 설탕과 크림을 적절하게 넣어 남에게 타 주긴 해도 내가 마실 커피는 없었다. 업무에 젖어있어야 했던 나와 커피타임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퇴근하여 머그잔에 커피를 타서 숭늉처럼 들이켰다. 블랙커피, 내 암연의 물빛이었다. 학문의 열망이 좁은 머그잔에 갇힌, 상흔이 연상되는 갈반의 그 물빛.


  


중년에는 바뀐 운명의 물빛이었다.

서 있을 공간을 놓쳐버려 망연한 채 있다가 하얗게 빛이 바랜 - 그것은 농약을 희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물에 농약을 타서 세월에 저항하듯 휘휘 저었다. 과수원 전체에 뿌릴 약 량은 500리터들이 드럼통으로 열세 통, 여덟 시간을 꼬박 농약만 뿌려야 했으니 분명 고달픈 노동이었다. 처녀 적 커피 물량의 만 배보다도 더 많은 물을 거느렸으니 그 당시의 물은 나이와 어떤 비례식으로 늘어났는지는 모르겠다. 블랙커피는 상흔의 물빛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허용해 주던 틈새가 남아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러나 농약 물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농도를 잘못 맞추면 갑작스레 짊어진 내 가족의 생계가 위태하고,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나의 생명이 끊기는 절규의 물이었다. 가는장대 끝에 아슴하게 매달린 것 같은 그 물은 나를 쥐어흔들기에 충분했다. 농약을 희석할 때마다, 텅 빈 옆자리의 슬픈 공간은 내 가슴을 파고 들어와 메마름으로 깃을 틀었다.


  응축된 고농도의 독소가 되었다. 가슴은 제초제를 맞은 잡초밭처럼 타 들어갔다. 물이 모자라니 피돌기가 멈춘 것처럼 답답해왔다. 눈물 한 방울도 짜내지 못하는 가슴은 점점 경화되어 갔다. 내가 물의 존재를 인식했던 것은 그때였다. 눈물이 가슴으로 이동하면 찌르는 가시가 되어 내 안의 아비규환을 초래하고, 그 너머의 카오스까지 간다는 것을.


  물속으로 인생이 흐르고,


  물빛으로 나의 시간을 읽는다.


  어머니의 양수와 계곡에서 발원한 물은 세상과 합류하면서 점점 혼탁해진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이 침전되지 못한 이유기도 하고 강한 생존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생존력, 내 것으로 깨닫거나 창의적으로 깨치거나, 카오스를 경험하면서 깨어나기 위한 강력한 힘.


  카오스의 세계는 위기감이 팽배하지만 곤충이 변태과정을 거치듯 지나야 할 과정이다. 풍요로 가기 위한 시간이고, 더 완전한 곤충이 되기 위한 혼돈이다. 물이 탁해지거나 여울지는 것은 더 넓고 깊고 푸른 바다로 가기 위한 여정이다. 혼탁해진 물이 흐르면서 맑은 물이 되는 것처럼, 비틀린 운명과 심사도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정화된다.



  시간이라는 정화제가 있다.



  내 유년에 보았던 물빛과 아버지의 물지게에서 보았던 물방울의 율동은 이제 나의 심연으로 회귀한다. 조약돌과 어울리던 맑은 물빛은, 내 마음 어딘가에서 다시 머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은 저의 책 《물빛》 (2006. 12.)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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