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나는 부엌이 편하다. 야채죽을 끓이기 위해 생쌀을 한 시간 정도 불려놓는다. 냉장고에 있는 온갖 야채를 꺼내니 가짓수가 꽤 된다. 파, 파프리카, 주키니, 양파, 당근. 개수대에 그득담긴 야채들을 다듬고 씻어듬성듬성 썰어서,아날로그 커터기에 다담다담 담는다. 줄이 연결된 손잡이를 대여섯 번만 당겼는데 컷과 믹스가한 번에 다된다. 참기름을 불에 달게 한 후 불린 쌀과 야채를 넣는다. 짜르르, 고소한 참기름 내음이 올라오며 염려로 엉킨 마음이 조금조금 녹는다.
단단하던 쌀이 익으며 유하고 투명해 가는 변화를지켜보면서 나무주걱으로 사부작사부작 저어준다. 서로 어울리는 모습이예뻐진다. 참기름이 흰쌀과 오색야채류를 끌어안으며 음식이 된다. 오늘 내 치아를 치료해 줄 치과의도, 내가 음식을 쿡하는 데 온도와 순서를 지키듯 이렇게, 내 치아를 쿡해 낼터, 그녀의 손끝에서 나의 치아가 점점 말갛고 멀끔해질 테다. 모양새가 점차 말쑥해질 이빨이, 순차적으로 가지런하게 짜 맞춰질 테다. 오늘 불량한 내 잇몸이, 내일은 우량한버팀목이 될 테다.
치과에 들어선다.
몇 번 얼굴을 마주하며 도움을 받은 적 있는 리셉션 그녀가 하이 홍, 하며 웃는다. 낯섦이 다정해지면서, 집에서 사인해 간페이퍼를 접수한다. 오늘 내가 받을 치료는 충치치료 한 개다. 다행히 이빨을 뺄 만큼 중증은 아니다. 하지만 잇몸이 너무 내려앉아서 잇몸 살을 입천장에서 빌려오는 이식수술을 할 거다. 그 시간이 총 두 시간반이 걸린다고, 지난번에코리언 덴티스트, L이 소상히 설명해 주었었다. 한국인이어도, 이번에도 L은 조곤조곤 영어로만 말을 걸어온다.
역시 저번처럼, 하나도 어렵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말해 주었다. 그녀를 도울 어시스트 간호사, B도 친절하다. 나는 오늘도 예의 그 치과의 베드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그녀들이 시키는대로 목을 좌우로 돌리며천장스크린의 영어자막에 시선을 두고 헤드폰을 듣기 시작했다.그래도 정신은내 입속 공사판에 초집중됐다.입을 엄청 크게 벌려야 할 때마다 입이 아팠다. 그때마다 B가 켜 준천장의드라마 속 인물들이, 통증과 힘듦을 완화시켜 주었다.섹슈얼 한 장면에서는 눈을 질끈감았다.
스크린 바깥의 그녀 둘은 내 가슴 위에서, 엄청 여러 개의 쇠붙이들을, 아주 재바른 손짓과 눈짓으로 주고받으며 내 입속을 치료해 나갔다. 이번엔 뜨르르륵, 크르르륵, 하며 베토벤 운명의 사운드로써 우렁차게 돌입했다. 쇠망치에 내 이빨갈리는 괴성도 났다. 얼음판을 휙 돌아가는 스케이트 소리도 났다.
그러고 보니 이 치과에선 한국에서 수시로 하던 가글을, 치료 시작하기 전에 파란 소독물로 딱 한 번밖에 안 시켰다.
그토록 바쁘고 터프하고 무서운치과치료 그 와중에,나의 뇌리에서는 좀, 엉뚱한 꼬리표가 수면 위 공처럼 떠오른다.왜, 충치가 생기는 걸까. 이토록 공격적인 쇠뭉치로 갈아도 끄떡없는 차돌보다 단단한 치아인데, 어쩌다 새까맣게 썩어버렸을까, 하며 나 혼자 묻고홀로 답을한다. 이후부터는 치아관리잘해야지, 하고. 또정기적으로 치과에 내원하여 체크받겠다고 맘을 단단히 먹는다.코로나로 인해 4년 동안이나 한국에 있는 치과를 못 간 사이, 낡아진 잇몸이 가엾다.
치과치료 시간은 터프하다.
가끔씩 나는 눈을 꾹, 감고 통증과 무섬증을 참아야 했다. 그러라고 그녀들이 크고 검은 플라스틱 안경을 내 안경 위에다 장착해 놓았다. 내가 부엌에서 계란지단을 정치하게 부치듯이,그녀들은 내 이빨을 차분한 손놀림으로 요리하고 있었다. 내가 부엌에서 감자를 얇게 채 썰듯, 내 입천장 살을 떼어낼 땐 무섬증이 더해서 잠깐 구역질이 났다. 그럴 때마다 L과 B는 내가 잘하고 있다며,나를 안심시켜 주었다.조금만 있으면 끝난다며, 어린이처럼 얼렀다. 나도 고맙다고 두 엄지를 세워 화답을 했다.
이식수술이 다 끝나고 L이, 내 입속사진을 한 장씩 넘기며보여주었다. B는 치통과 부기를 진정시키는 파나돌 두 알과 스테로이드제 한 알을갖다 놓는다. 이번에도 물과 사과주스 컵이 크리스털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대접받는 기분이다. 마취가 안 풀려 우둔하며 어색한 볼살 속으로, 기분 좋게 알약을 털어 넣고 두 액체를 마셨다. L은 3~5일까지는 여전히 아플 거고, 일주일 간 이쪽은 칫솔질하지 말고, 스크램블드 에그보다 거친 음식은 당분간 먹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말해준 후 다른 환자를 돌보러 나갔다. 그녀의 뒤통수까지도 이뻐 보였다.
딸이 픽업하여 집으로 온 지 다섯 시간이 지난 지금, 마취가 조금씩 풀리면서 통증이 우르르 몰려온다. 부어오른 내 볼 속에서시림과 쑤심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래도 실력 있고 친절하고 배려하는 덴티스트와 어시스턴트를 만나 치료를 받아서 마음이 가뿐가볍다. 호주불 1,719달러(한국돈 150만 원 정도)를 지불했으니, 앞으로 난 치아관리만 잘하면 된다.2주 후엔 실밥을 풀러 마실 가듯 갈거다.
아침에 온갖 집안일을 다 해놓고 갔으니, 당분간 가정주부 휴무다. 아, 얼마만인가.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