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이어령과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이번 생에서 자식을 모두 열 둘을 낳았다. 열 둘 가운데 여섯이 죽고 여섯이 살아남았다. 반이 죽고 반이 살아남는 도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었고, 인민군에게 끌려갔던 외할아버지가 밤중에 몰래 산을 넘고 또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자식들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열 두번째 자식이다. 막내딸. 먹고 살기 힘들었던 50년대. 막내딸이라고 금지옥엽, 호호 불며 키우지도 않았고 키울 수도 없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나를 낳았는데도 내가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이미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도 언제나 쪽 진 머리에 한복을 입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를 보면 틀니를 하지 않은 입술을 합, 다물며 환하게 웃던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꽃을 무척 좋아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작약을 심어두고 작은 외삼촌과 어머니에게 누가 꺾어가는지 지켜보라고 시켰단다. 드문 드문,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외할머니는, 내가 알던 할머니가 아닌 것처럼 ‘쿨’하고 멋지다.
평생을, 우울함에 시달렸다.
정말 평생을. 어릴 때부터 느꼈던 우울함이라는 감정은, 어렸을 때는 이름을 붙이지 못했지만, 외로움과 더불어 나를 갉아댔고, 청소년기에 알게 된 우울이라는 이름은, 내 감정에 찰싹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인정할 수 없었던 감정이었을 뿐. 나는 명랑해야 하고, 밝아야 하고, 행복해야 했다. 스스로가 내린 명령. 너는 행복해야 해. 삶이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저 앞에 있는 터널 벽에 박으면 이대로 죽을 수 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생각을 한 날 밤, 엉금엉금, 현관에 엎어져서 한참을 엎드렸다가 침대로 기어갔던 그 날 밤을 기점으로, 나는 내 안에 우울을 인정했다. 너 거기 있었구나.
동생의 배 속에 조카가 자리잡고, 기후 위기로 인류의 앞날이 불투명한데, 내 조카는 태어난단다. 코로나로 모두가 갑갑하던 시절에, 조카는 이 세상에 나타났다. 조카도 제 뜻으로 이 세상에 오진 않았지.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녀석이 살아갈 앞날이, 겪을 일들이 서러웠다. 투명하고 투명한, 맑고 맑은 조카의 눈망울과 웃음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넘쳐나다가도 문득 문득 서러웠다. 조카를 만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하릴없이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곤 했다. 누구는 너무 지나치다고 했지만, 삶이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조카의 눈부심은 또다른 서글픔이었다.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읽었다. 서울대학교 명강의를 책으로 옮겼다는 서가명강 열여덟번째.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21세기북스, 2021). 쇼펜하우어 철학 입문으로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그저 염세주의자라고만 알았는데, 읽어보니, 삶은 고통이고 모든 것은 무이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결국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현재를, 지금을 잘 살아라다. 부처처럼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를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뻔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으면서 천천히 그의 철학을 읽어나가다보면 어느새 위로를 받게 된다. 괜찮다고. 지금처럼 하루 하루를 살아나가라고.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다들 그렇다고.
“ Life swings like a pendulum backward and forward between pain and boredom.”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에게는 욕망과 권태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욕망이 신속하게 충족되는 상태가 행복이고, 늦게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는 상태가 고통이라고. 인간은 행복보다는 고통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애써야 한단다. ‘행복한 인생이란 고통이 없어 견딜 만한 인생이다.’(47쪽)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권태에서 오락가락하는 삶이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삶이 원할만한 것이 아님을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삶에서 겪는 고통은 인간이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인으로서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236쪽) 삶이 고통이자 일종의 꿈, 더 나아가 꺠어날 때까지 줄곧 가위눌리는 끔찍한 악몽이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했던 건, 그러니까, 그러므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자는 것이다.
“Each day is a little life: every waking and rising a little birth, every fresh morning a little youth, every going to rest and sleep a little death.”
날마다가 인생이다. 날마다 깨어나고 일어나는 것은 탄생이고, 날마다 주어지는 상쾌한 아침은 청춘이며, 날마다 잠자리에 들어 쉬는 것은 죽음이다.
트위터에서 우연히, 2019년 이어령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마침 쇼펜하우어 책을 읽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때에 만난 글.
선생은 요즘 탄생 자체를 비극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데 지금 죽음 앞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는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지난 설에 할머니, 어머니, 작은 어머니와 만두를 빚다가,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 동생들이 그립다고 말씀하셔서, 철 없이 물었다.
“할머니, 사는 게 재밌어?”
“그럼, 재밌지. 그래도, 아이구, 너무 오래 살지 말고 얼른 갔으면 좋겠다. 그래도 재밌어, 사는 게.”
“나는 가끔 사는 게 재미 없는데. 지겨워.”
여든을 훌쩍 넘긴 할머니 앞에서 이런 흰소리를 하는 손녀를 보고 어머니는 얼른 작은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야, 우리 엄마는 참 당당했어. 딸자식들 공부를 못 시켰어도 한 번도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어. 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요?”
작은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니들이 나 아니었으면 세상 구경이라도 했겠니? 이랬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당당했어. 참 대단한 할머니야.”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참으로 당당한 할머니고 말고네. ‘니들이 나 아니었으면 세상 구경이라도 했겠니!’ 라니. 네, 그렇죠. 그래서 저도 세상 구경을 했으니까요. 어쩌면, 손녀가 책을 읽고 울며 불며 아등바등 알아내려고 애썼던 그 무엇을, 외할머니는 당당하게 알고 있었네요. 생명은 그런 존재라는 것.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을 볼 수 있으니, ‘호젓하게 사물과 세계를 관조하며 마음에 저절로 평안이 깃들게 할 것.’ 이제, 스스로에게 행복해야 한다는 명령은 내리지 않아요. 대신, 이렇게 다짐합니다. ‘날마다를 살아나갈 것. 당당하게, 자유롭게, 아름답게.’ 보고 싶습니다, 외할머니. (2022.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