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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 Jan 18. 2023

모스바나 정원을 가꾸던 이상한 노인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빨간 조끼를 입은 노동조합원이 교정 안에 늘어서있다. 오늘은 청소복과 경비 유니폼을 벗은 사복차림이다. ‘또 시위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때 스치듯 몇몇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든 팻말에는 시급 440원 인상, 샤워실 설치, 퇴직자 인력 충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노조원들은 원청인 학교를 상대로 노동 처우 개선을 요구했지만 학교는 교섭대상이 틀렸다며 하청에게 화살을 돌렸다. 원청은 이번 ‘쟁의’의 당사자가 아니며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엄연히 말하면 이 집회의 주체가 학교에 ‘속한’ 사람은 아니니 그냥 두면 그들이 알아서 멈출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원청의 이러한 소극적 대응은 이런 ‘집회’의 판례로 남을 것이다. 직접 고용이 아닌 간접 고용이기에 원청은 하청의 용역업체 직원의 처우를 바꿀 권한이 없다고 말이다. 원청이 하청에게 끼치는 영향력과 그 장악력은 이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알지만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을과 을이 힘을 합쳐 갑을 이기기는 쉽지 않고 그런 선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청은 원청의 지시 없이는 무언갈 바꿀 힘이 없다고 원청 뒤에 숨는다. 학교에서 일하는 용역 청소원, 경비원들은 원청과 하청에게 똑같이 외부인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이 노조원들은 누구의 근로자이고, 누구의 구성원인 걸까?

  2055년, 소설 속 인류는 대재앙의 시대를 산다. 지구 어디에도 더스트 폭풍의 피해가 없는 땅은 찾기 힘들다. 문명은 무너지고 자연은 파괴되고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죽는다. 인류는 폐허 위에 돔시티를 지어 더스트를 피할 임시적 거처로 삼는다. 

  돔에 입성한 인간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 생존을 위한 거래에는 더스트 내성종을 사냥하여 고가(高價)에 팔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터전을 내주고 돈을 받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기적 습성은 시대의 흐름이 되어 공동체를 지배했고 돔 안팎으로는 침입자와 배신자가 늘어갔다. 그로 인해 공동체는 쉽게 와해되고는 했다.

  로봇정비사인 지수는 돔시티를 찾다가 깊은 숲 속에서 온실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사이보그인 레이첼을 만난다. 지수는 이곳 ‘프림빌리지’에서 며칠 머무를 생각으로 레이첼의 로봇 팔다리를 보수해 주고 자신의 몸을 보호받기로 한다. 이제까지 해왔던 보통의 거래와는 다르게 지수는 이 관계 속에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지키고 싶은 공동체가 생겼다는 것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활력감과 생의 의욕을 불어넣는다.

  우연한 기회에 레이첼의 온실에 들어간 그녀는 ‘모스바나’를 발견하고 이 식물에 더스트 독성 분해 효과가 있음을 알아낸다. 지수는 레이첼을 설득시켜 여러 실험을 거쳐 ‘모스바나’ 성분에서 추출한 더스트 분해제를 얻게 된다. 그녀는 안전지대를 찾아 ‘프림빌리지’에 몰려든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더스트 분해제를 공유한다. 이는 둘만의 거래가 공동체로 확장하게 되는 시작점이 된다. 

  프림빌리지 사람들은 ‘온실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의식을 학습하게 된다. 이들은 더스트 분해제를 얻은 특혜 받은 사람들이란 점에서 구성원들끼리의 결속과 협력도 강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공동체를 지킨다는 사명을 갖고 각자의 책임과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온실의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발생하는 불편함을 견뎠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숲의 경계를 정찰했다. 어른들은 다음 세대인 아이들을 교육시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르쳤다. 더 이상 도망칠 힘도 없어 이곳에서 그냥 죽자고 말했던 이들을 살고 싶게 만든 것은 이런 ‘연대’였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주는 것은 함께 더 오래 많은 길을 달릴 수 있게 만들어준다. 

  프림빌리지도 더스트로부터 안전하지 않게 된 날, 사람들은 피신하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한다. 어디든 정착하면 모스바나를 심고 기르기로 한 것이다. 의무처럼 다짐하고 지켰던 약속은 시간을 만나 모스바나 군락지를 형성한다.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더스트 완전 종식이 선언되고 인류는 대재앙을 과학 기술로 극복했다며 자축하고 기뻐한다. 한편 더스트 생태학 연구원인 아영은 정부의 이런 공식 발표가 사실과 차이가 있음을 포착해 낸다. 

  그녀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치솟았던 더스트 농도를 과학의 통제 범위 안까지 진입시켰던 결정적 요인은 전 세계에 뻗어나가 밀집해 자라났던 ‘모스바나’라는 식물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전 세계로 흩어진 프림빌리지 사람들의 연합이 지구의 끝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프림빌리지를 떠나야 할 때 지수가 나오미에게 했던 말이다. 아이는 빨리 자라고 쉽게 잊는다는 말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이 약속을 평생 마음속에 새기고 지켜간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결속력은 세상을 구했고 인류를 구했고 그들 자신도 구원했다.

  한 여름 작열하는 태양빛이 아래로 떨어져 땅이 들끓는 것처럼 보인다. 빨간 물결이 일렁거려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사용자는 없고 근로자만 존재하는 이상한 노동 쟁의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이 대치 상황은 왠지 돔시티 안에 들어가려는 인간들과 이를 막고 선 군인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가 "저도 빨간 조끼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다. 하나는 금세 둘이 되고 셋이 되어 빨간 행렬을 지었다. 나는 가까운 미래를 이미 책 속에서 보아서 이 분쟁도 머잖아 해결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동체와 그 사회가 맞이할 행복한 결말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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