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팀 3년 차가 말해주는 해외 직장 생활
어느덧 싱가폴 직장 생활 3년 차에 접어든다. 여기는 코로나19로 인해 전국적으로 무기한 재택근무 중이다.
아무래도 요즘 타격이 가장 큰 업계는 여행, 항공, 요식, 그리고 리테일이 아닐까 싶다. 패션 브랜드에서 일하다 보니 회사 매출의 막대한 손실을 체감하게 된다. 수십 수백 명의 직원들이 정리해고 당했다는 소식 또한 이제는 별로 놀랍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다 문득 올해 졸업해 취준 하는 대학교 후배들이 생각났다. "아 이 친구들은 정말 더럽게도 운이 없네. 지금 같은 시국에 졸업하다니..." 직격탄을 받은 대부분의 회사들은 현재 비용 절감에 들어갔기 때문에 연말까지 채용시장은 완전히 얼어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타격이 비교적 적은 몇몇의 큰 IT기업들은 아직도 활발히 채용 활동을 재개하고 있으나 그 많은 구직자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취준 해야 하는 후배들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2년이라는 짧은 회사 생활이지만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직장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을 풀어 보려고 한다. (물론, 다국적 기업 근무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니 한국 기업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누군가가 명문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여러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구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좋은 교육을 받은 준비된 사람이겠구나 등등. 사람의 지적능력을 측정하기에 이만한 증거가 없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대학교를 나왔다면 신입 채용에 있어 꽤나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입사하는 순간 내 대학 이름, 성적, 인턴 경험 등 수많은 우리의 "스펙"들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어진다. 지금까지는 대학 타이틀이 어느 정도 나를 정의하고 대변해 줬을지는 몰라도 입사하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평사원일 뿐이다. 나중에 이직을 하게 될 때도 회사 입장에서 나는 "A 기업에서 XXX 업무를 담당한 사람"이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뭐, 있어봤자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나 보네 정도?). 너무나도 다양한 학교 출신들이 많은 회사일수록 학연 효과조차도 거의 무의미하다.
주변에서 공부 머리랑 일 머리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학교 성적과 회사 업무 능력의 상관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입사 후에 만난 수많은 동료들 중 정말 일 잘한다고 느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평범한 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오히려 명문대 나온 사람들 중 업무능력이 비교적 떨어지는 사람도 많았을뿐더러 더욱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대학 조차 나오지 않은 고졸 출신 동료들의 업무능력이 팀 내에서 월등했을 때였다.
지금 취준생들 중 혹시 입사 후에도 대학 타이틀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명문대 타이틀이 없는 취준생들이라면 걱정하지 말자. 입사 후엔 모든 것은 성과로 평가된다.
전공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아무리 전공을 살린 신입이라고 한들 입사하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입사 전에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과 똑똑한 선배들을 통해 열심히 업무를 배워야겠다는 기대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를 수 있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배우는 곳이 아니다. 회사 업무를 익히는 것은 자기 주도 학습의 연장선이다. 물론 큰 회사일수록 업무가 세분화되고 조직과 업무에 명확한 체계가 잡혀있다. 작은 회사들은 자기 업무에 대한 선이 불분명하고 일당백으로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회사의 규모와 상관없이 자신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배워야 하는 직원들이 대다수다. 처음 입사했을 때가 기억난다. 업무 시간 중 구글 검색을 하면서 많은 것을 혼자 익혀왔다. 가끔 눈치 보며 사수에게 질문하며 배우긴 했지만 말이다.
큰 회사일수록 뭔가 엄청난 직원 트레이닝이 준비되어 있을 것 같지만 항상 그렇지도 않다. 결국 혼자 얼마나 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잘 따라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학창 시절의 퍼주기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다면 곤란하다. 운이 좋다면 자세하게 가르쳐 주는 선배들이 주위에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운영되는 회사일수록 남의 일을 하나하나 도와줄 정도로 한가한 팀원들이 많지 않다.
회사가 크고 유명할수록 봉급도 높고 복지도 좋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직을 하게 되더라도 큰 기업에 다녔다는 이력 또한 어느 정도 메리트로 작용되기 쉽고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서든지 조금이라도 더 크고 성공한 기업으로 입사하려 몸부림친다.
하지만 내가 "어떤 회사"를 다니냐 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떤 팀"에 소속되어 있냐는 것이다. 아무리 좋고 큰 회사에 다닐지라도 팀이 엉망이면 회사 생활이 즐겁지 않다. 팀원들과의 갈등이 잦고 업무 스타일도 너무 다르다 보면 꿈꾸던 직장에 다니더라도 항상 이직을 상상하게 된다. 업무 자체가 나와 성향이 맞지 않을 경우 더 버티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상사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에 있다. 나를 진심으로 이끌어 주는 상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주기적으로 나의 성장을 도와주고 기회를 주는 상사가 있는 반면 자신의 성과에만 집중하며 내 업무에 태클만 거는 상사도 많다. 정말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네임밸류도 좋겠지만 분위기 좋은 팀과 내 성장에 관심을 갖는 상사가 백배 천배 유익하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정치질만 해대는 사람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피하는 게 상식이다. 학교든 직장이든 사람이 연루된 곳은 어디나 똑같다. 업무를 성실히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도 어떻게 쉽고 편하게 회사생활을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그중 업무 수행 능력만으로 평가받기보다 인간관계를 쥐락펴락해서 일을 해결하려는 부류는 팀과 회사의 문화를 흐려 놓는다.
정치질 하는 문화는 근절되어야 하지만 정치가 없는 회사는 있을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회사는 주어진 일을 도맡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러 팀들이 협력할 때도 많으나 자기들만의 관점에서 회사의 방향성을 잡아가려고 힘쓰기도 한다. 이때는 업무지식과 경험도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들을 모으는 것 또한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 있는 언변술과 협상의 기술로 보일 수 도 있지만 이 또한 팀의 힘이고 영향력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회사 내에서의 영향력이 없다면 회사는 잘못된 선택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자신의 일만 잘한다면야 팀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꽤나 보람찬 회사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묵묵히 내 일만 해서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 자신이 업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 누가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혹시 팀원들 사이에서만 인정받고 있다면 나 자신을 어떻게 마케팅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회사에서 일만 잘하면 되지 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색내야 하냐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가까운 팀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 현실이다.
내 커리어를 좌지우지하는 큰 결정들은 보통 팀원들이 아닌 회사 내의 "높은 사람"들이 내린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일하기 바쁘기 때문에 아랫 직원들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한 명 한 명 알 방법이 없다. 결국 내가 열심히 "티 내면서" 일하지 않는다면 사내 인사이동이나 구조조정이 있을 때 원치 않는 결과를 직면해야 할 수 도 있다. 이번 코로나 위기로 인해 실직된 주변의 동료들만 봐도 그렇다.
각자의 경험에는 편차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위 5가지의 의견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직장 생활이 어떻든 간에 제발 아무 곳이라도 불러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절실한 취준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누구든 언젠간 입사를 하게 될 것이고 각자 직장 생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지금 당장은 취업하는 게 당연히 먼저겠지만 준비하는 동안 즐거운 회사생활을 하기 위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