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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Apr 26. 2021

의미의 죽음

예술 작품을 오롯이 즐기는 방법

GV(관객과의 무대 인사)를 보러 가면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이 영화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토씨 하나 변하지 않는 질문. 로맨스 영화든, 스릴러 영화든, 어떤 종류의 영화라도 이 질문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가끔 이런저런 색다른 질문에 ‘흐음 오늘은 좀 안 나오려나’ 하다가도, 이 질리도록 식상한 메시지 질문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어떻게든 등장하고야 만다. 그러면 감독은 “흐음… 이 영화를 통해서는 말이죠…” 하며 이러쿵저러쿵 대답하지만 그게 마냥 달갑지는 않다.


  영화제를 깨나 가본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본 질문일 것이다. 이는 지역과 장르를 넘어서는 범전국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니 많은 GV를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나만 쏙 빼놓고 “자자.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내면 팝콘 쿠폰을 드립니다” 하고 진행되는 이벤트가 아닐까, 의심하는 지경에 치닫는다. 언젠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처럼 ‘한국인이 좋아하는 의미 부여 100’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그나저나 저자는 꽤 돈을 많이 벌 것 같군요).


  어떻게든 단 한 가지의 정답을 갈구하고,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우리가 한평생 걸어왔던 교육의 산물의 탓이 큰 것 같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국어시간에 그어왔던 동그라미와 세모가 이에 대한 산증인이다. 시어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어 긍정어니, 부정어니 하는 것 말이다. 하나의 작품에는 응당 수많은 의견이 파생되기 마련이다. 문학은 물론이거니와 미술이나 음악,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 장르는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로 정리할 수 있다면 작품으로 힘들게 표현할 이유가 없다. 긍정어니 부정어니 하는 이런 교과서적인 말들은 결국 드넓은 사고의 들녘에 높은 장벽을 세우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영화의 해석은 관객의 몫이고, 비평가의 몫이며, 감독과 작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몫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기 전에 대중들이 줄곧 오인하는 것은 작품에는 필경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간단하면서도 보다 사실적인 얘기를 빈 깡통을 지르밟듯 사뿐히 넘겨버린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런저런 의미들을 비윤리적인 푸아그라의 생산법처럼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가들이 사회적 운동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에 한 작품을 바라볼 때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강박적으로 물어보는 것 아닐까.


  한 지인에게 들은 윤여정 배우의 일화를 나는 깊이 공감하고 있다. 소주를 한 잔씩 걸치고 나눈 사담이었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핏 이런 얘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GV에서 만난 한 학생이 윤여정 배우에게 또렷한 말투로 자신의 분석을 장황히 늘어놓았다. “(전략)……은 이렇게 해석되는데, 고양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논설문과 같은 그의 질문 끝에 윤여정 배우는 침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 같은데, 그렇게 조목조목 분석하는 것만이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은 아니에요. 큰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영화를 읽어내는 것. 이것 역시 좋은 감상 방법이랍니다.


  특정한 대상을 언급하고 얘기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관객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감독은 적잖이 피곤할 것만 같다. 불현듯 떠올라 넣은 장면일지라도 “으음… 분명 관객들이 물어볼 것이 틀림없으니 ‘사랑의 양면성에 대해 전달하고 싶었다’라고 대충 얼버무려야겠군” 하며 마치 성적표를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횡설수설하는 초등학생처럼 대답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그런 거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것도 곤란하다. “허어, 저 감독 힘은 그렇게 주더만 다 허당이었고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결코 교사가 아니며 사회를 계몽시키는 운동가도 아니다.
  흔히 예술은 낮에 꾸는 꿈이라고 부른다. 예술은 충족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반항이요, 오락의 일종으로 볼뿐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 아무리 거창한 뜻을 담고 있다고 한들, 재미가 없는 영화라면 나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나는 고도 자본주의 시대의 이중적인 내면과 불편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영화를 보겠어” 하는 관객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작가는 만담꾼의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작품에 내포된 메시지는(설령 메시지가 없다고 하여도) 작가의 입을 통해서 나와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는 순간 우리의 눈앞에는 백 미터쯤 되는 높은 장벽이 세워지며 시야는 다분히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의미란 감상자 개개인이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 상식 등과 결부되어 각자가 다른 결론에 치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메시지는 저절로 따라와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의미란 푸아그라와 같아서 건강한 푸아그라는 결코 억지로 음식을 떠먹인들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집어넣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 모두에게 고통을 수반하는 방법일 뿐이다. 건강한 푸아그라를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거위가 자연스럽게 양분을 비축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다.


  거위와는 약간 동떨어진 얘기지만, 선불교의 임제선사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을 남겼다.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다. 요컨대, 깨달음은 그들에게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아내야만 쟁취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술을 대해야 하는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의미를 만나면 의미를 죽여 버리는 것. 이는 작품을 나만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아무 생각이 없어도 좋고 아무 생각이어도 좋다. 그 어떤 것도 좋으니 얽매이지 말고 그저 마음껏 사고하시기를. 요컨대 ‘의미의 죽음’은 곧 ‘의미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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