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석 Jun 29. 2020

여름이 싫어서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돌아온다

나는 여름이 싫다.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벌레, 습도, 날씨 등등… 물론 다들 싫어하는 것 몇 개쯤은 있다. 개인의 따라 그 질량의 차이만 있을 뿐.' 삶의 진리를 진즉이 터득한 신부나 승려일지라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위에 죽은 벌레가 누워 있다던가, 손을 씻기 위해 들어간 화장실에서 물이 흥건히 적셔진 슬리퍼를 신었을 때, 거기에 살갗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축축하면서도 음험한 존재를 절감할 때면 그들도 별 수 없이 ‘아아. 싫다 싫어.’하는 불쾌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싫다는 것은 그 어떤 죄악도 비난받아야 할 책무도 지니지 않는다. 어쩌면 무언가가 좋고, 싫고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각기 다른 인간임을 실증하는 가장 속 편한 수단이라 생각한다.


가령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는 일요일을 싫어한다. 이는 출근을 직전에 둔 월요일 때문일 수도, 아니면 ‘일요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일 수도 있다. 하기야 요즘 같은 날씨엔, 가만히만 있어도 어느 점착성 있는 물질이 다닥다닥 들러붙은 듯이 온몸이 끈적이다. 그런데 에어컨조차 미약한 약냉방 칸 속에서, 갖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은 얼마나 끔찍할까. 또 그걸 생각하는 일요일 저녁은 여간 참담한 게 아닐 것이다. 하물며 요즘 같은 날씨엔 ‘흐음. 정말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군.’하고 뫼르소의 항변에 동의의 한 표를 던져주고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여름이 싫다―여기까지 쓰고 또 뭐가 싫지? 하며 생각하다 보니 시리즈물 영화가 싫고, 쓸데없는 교훈주의가 싫다. 또 골똘히 생각하니 무엇보다 파인애플이 싫다(이 역시 여름과 연관돼 있다). 요즘엔 파인애플이 들어간 햄버거나 피자를 파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이는 패스트푸드를 기질적으로 싫어하는 어느 지하조직(아마 채식주의와 연관돼 있을 것만 같다)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결론으로 치닫는다. 유명 프랜차이즈 피자회사에서 “역시 피자에는 파인애플이지. 어이 당장 레시피를 개발해보자고.”하는 장면은 양보를 하고 또 해도 도통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이런저런 가정을 세우다 보면 결국 어두운 지하조직의 음모로 이어지고, 뭐 그런 것이다.


엇비슷한 이야긴데, 20세기 초의 미국인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있다. 그녀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만드는 모 회사의 지원으로 하와이에 석 달간 체류했다. 왕성한 창작 활동 중에서도 유독 파인애플만은 결코 그리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아니, 널린 게 파인애플인데 그저 뚝딱하고 그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하고 언성 높은 의문을 던질 수도 있지만 나는 그저 ‘으음, 합당하군 합당해!’하고 생각했다. 그녀도 어떤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파인애플이 몰던 차에 가족이 세상을 여의셨다던가, 보증을 서달라고 하고 하와이로 도피해버린 파인애플이 있다던가 같은. 물론 지하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여름이 되면 많은 제약에 둘러싸인다. 특히 옷에 한에서는 전적으로 그렇다. 내가 길쭉길쭉한 모델이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바지와 흰 티셔츠 몇 벌만으로도 가뿐히 여름을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무 살 최경석의 여름은 들쑥날쑥한 나의 체형을 곧이곧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옷은, 즉 패션은 나를 표현하는 가장 일차원적인 요소다. 거기에는 보인다의 의미도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콤플렉스를 덧대고 있다. 머리가 짧은 군인들이 모자를 쓰고, 다래끼가 난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는 취향적인 측면에서나 체형적인 측면에서나 여름이 달갑지만은 않다. 여름이 되면―들쑥날쑥한 몸매를 가진―나는 이런 문제에서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20세기 중반, 당대 최고의 ‘댄디보이’이자 ‘명동백작’이라고 불렸던 박인환 시인의 언구가 생각난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냐?


나 역시 두툼한 양복이 좋다(홈스펀보단 트위드나 헤링본이 좋다). 그 위에는 종아리까지 오는 바바리를 걸치고 양손을 주머니 속에 푹 집어넣는다. 여기에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머플러와 머리칼, 정면으로 맞는 바람을 피해 살짝 숙인 고개는 겨울에만 자아낼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세 문장을 한 단어로 줄이면 ‘고독’쯤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혹은 ‘현학’이나 ‘겉멋’도 되는 것 같군요. 폼생폼사 아니겠습니까. 허허).


짓궂게 친구를 괴롭히면 불현듯 ‘너무 심했나?’하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불현듯 미약한 여름의 장점이 슬금슬금 떠오른다. 이를테면 하루의 끈적함을 차가운 물로 게워낸 후의 방금 썰어낸 수박의 청량한 식감은 여름에만 느낄 수 있다. 또는 머리가 띵―할 만큼 차가운 보리차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고 후우후우, 냉기 섞인 숨결을 돌릴 때. 흔히들 떠드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의미를 잠깐이나마 알 것 같다. 아니면 12월. 진흙 같은 눈더미가 도시 곳곳에서 짓밟혀 있고, 너무도 눈에 익어버린 트리 장식의 지쳐있을 때. 그럴 때면 종종 나는 여름을 생각했다. 곧게 뻗은 갖가지 나무들과 순진한 나뭇잎 사이로 뻐금 뻐금 떨어지는 햇빛들. 도시의 곳곳에는 옛 미군 장교의 수염처럼 구석구석 초록이 자라나고, 해 질 녘에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매일 다른 빛깔의 노을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풍경으로써의 여름은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다. 이렇게 부분 부분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한다면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삶일 테지만, 모두가 아시다시피 불가능하다. 식사를 하려는데 종종 죽은 벌레가 올라갈 수도 있고, 성급히 들어간 화장실에서 축축하게 젖어버린 양말에 질색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역시 삶의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것이군.’이라는 낙천적인 결론을 내리다가도 10분만 바깥에 나갔다 오면 ‘이거, 태양이 한국전력에게 뒷돈이라도 먹은 거 아니야?’하는 또 거대 지하조직의 음모를 생각하게 된다. 그나저나 여름에도 쫙 빼입은 정장을 고수했다는 박인환도 참 대단하다. 요즘이면 어땠을까. 젖은 머리칼조차 5분이면 푸석푸석 말라버리는 2018년 여름. 댄디보이인 그조차도 참을 수 없어, 훌렁훌렁 벗어던질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상수식 에세이 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