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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Jun 12. 2024

초크라인 사용법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선긋기에 대하여.

선을 긋는다. 선을 넘는다. 선을 지킨다. 


공사 현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초크라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초크라인은 말그대로 분필가루가 묻어있는 와이어를 이용해서 긴 선을 정확하게 긋기위한 도구다. 겉보기에 초크라인은 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다란 선이 한손에 들어오는 작은 박스속에 돌돌돌 감겨있다. 선의 끄트머리에는 클립같은게 메어져 밖으로 튀어나와있다. 줄자의 끄트머리가 기역자로 꺽여 박스 외부에 걸려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초크라인은 시작점과 끝점을 정한뒤 그 사이를 잇는 직선을 긋는다. 보통의 자를 활용해 한획에 긋기 어려울만큼 시작점과 끝점간의 거리가 멀어질 경우에 유용하다. 그리고 건축 공간에서는 대부분의 선들이 사람의 팔로 그을 수 있는 한획의 범주를 벗어나곤 한다. 방의 한면은 적어도 4-5미터에 달하고, 집 전체를 생각하면 10미터를 훌쩍 넘어가는게 다반사다. 공사 현장에서 초반작업을 하다보면, 거주자로서 한눈에 파악할 기회가 없던 선들을 그어볼 기회를 마주하게 된다. 


지금 한창 진행중인 레이아웃 작업은 가로 40피트, 세로 80피트로 4세대 주택을 위한 것이다. 미터로 환산하면 가로 12미터, 세로 24미터 가량에 달한다. 일단 시멘트로 지반작업을 마치고 나면 건축 도면에 따라서 외벽과 내벽이 세워질 자리에 선을 긋기 시작한다. 한명이 한쪽 끝을, 다른 한명이 다른쪽 끝을 초크라인으로 맞춘다. 해비타트 LA의 주택공사에서 보통 허용되는 오차는 최대 1/4인치(약 6밀리미터)지만 그래도 최대한 정확해야한다. 


작은 오차는 개별적으로 봤을대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누적되면 돌이키기 힘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최초의 레이아웃 작업부터, 실제로 목재 구조체로 만들어진 벽을 세우고, 구조체 내외에 합판을 부착하는 식으로 여러 단계를 통해 작업이 이어져간다. 이 과정에서 매번 5밀리 정도의 오차가 생긴다고 하면 금새 눈에 띌만큼 벽면이 틀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단순히 정사각형 모양의 방을 만드는 플랜이라면, 축적된 오차로 인해서 꼭지점이 어긋나는건 시간문제다. 


이상적으로는 줄자의 최소눈금 안에서 정확도를 컨트롤하는게 좋다. 인치의 경우 1/16인치가 최소 눈금이다. 약 1.5밀리미터. 그 눈금 속에서 건축이 시작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에서도 정확히 음정과 박자를 맞춘 뒤에야, 눈금으로 측정되지 않는 아주 작은 차이로부터 개성과 스타일이 만들어 지는 것과 같다. 예술과 감동은 측정되지 않는 수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지금 건설중인 다세대 주택의 한 가구 플랜은 정사각형 두개를 이어놓은 지극히 단순한 플랜에 불과하다. 이런 플랜을 소프트웨어 상에서 1:50정도의 비율로 그리는건 식은죽 먹기다. 하지만 완전한 평면이 존재하지 않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수십미터에 달하는 1:1 비율의 선을 정확하게 그어내는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머릿속에선 단순하기 그지없는 직선과 직각이, 실제로는 정확히 구현하기 가장 어려운 이상적 개념이라는걸 배우게 된다. 


시작점과 끝점을 줄자 최소눈금 범위 안엥서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해도 오차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초크라인은, 시작점과 끝점을 맞춘 뒤 그 사이를 잇는 분필선을 튕기는 식으로 바닥에 선을 긋는다. 정확한 마킹을 위해서는 팽팽해진 분필선을 정확히 지면과 수직인 방향으로 당겼다 놓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비스듬하게 당겨올려 튕기면 미세하게 휘어진 선이 그어지게 된다. 지면과 정확히 수직방향으로 당겨 올리는 작업은 순전히 사람의 눈과 손가락의 감각에 의지해 이뤄진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줄자의 최소 눈금 내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측정되지 않는 오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곳 공사현장에 나가기 전까지 가장 많이 그어온 선은 A4용지만한 스케치북에 습관처럼 그어온 연필선이었다. 미술을 처음 배우면, 특히 데생의 경우, 선긋기부터 시작한다. 4B연필을 들고 흰 2절지에 가로로 긴, 혹은 세로로 긴 직선을 긋는다. 빼곡하게 긋는다. 기본중에 기본이지만 그 작업을 미술을 관두고난 뒤에도 계속해온 이유는 진짜 직선을 그어낸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직선을 그을수는 없다. 직선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는게 최선이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는 시작점과 끝점, 단 두번의 클릭만으로 그어지는 직선을 물리적인 세계에서 그어내는건 전혀 다른 문제다. 


직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어려움은 더 커진다. 연필은 초크라인으로 교체되고, 연필을 잡은 한 사람의 한쪽손은 두 사람의 양손으로 교체된다. 스케치북의 선은 혼자서 시작점과 끝점을 정확히 결정해 그을 수 있다. 그러나 10미터짜리 선의 시작점과 끝점을 한 개인의 육안으로 동시에 바라보는건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겨우 선하나 긋는게 사람간의 신뢰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시작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끝점을 파트너가 정확히 맞춰잡았다고 믿지 않고서는 선을 긋지 못한다. 


파트너를 믿는게 무슨 큰 문제인가? 그러나 스케치북에 그어온 선만큼 타인에게도 선을 그어온 사람이라면, 타인에 대한 신뢰만큼 큰 문제는 없다. 타인과 나 사이에 넘어서는 안될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침범하는 사람들을 착실히 자신의 세계에서 지워온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의 초크라인은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 선을 넘어오는 이들을 착실하게 지워온만큼, 스스로도 선을 넘어 타인을 향해가지 않는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굳이 이런 글을 쓰는건 지난 한주동안, 내가 그어놓은 초크라인에 발자국이 수도없이 찍혔기 때문이다. 


현장 소장 마크를 비롯한 스텝들이 수도 없이 그 선을 밟고 드나들었다. 놀라운건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역시도 그 선을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그들과 줄자의 한쪽 끝과 다른쪽 끝을 나눠잡고, 혹은 초크라인의 한쪽 끝과 다른쪽 끝을 나누어 잡고 일하는 중에는 까마득히 몰랐다.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점점 커졌지만 그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나눠잡은건 줄자와 초크라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붉은색 고운 가루로 그어져 있던, 흐릿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쳐긋던 그 직선을 군데군데 끊어놓는 발자국들이 있다. 내일은 새로산 작업화를 신고 현장을 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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