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출산 이후의 세계 - 가벼워진 주머니와 두 마리 토끼 잡기
호기롭게 로스쿨에 들어와 갖은 고초를 겪고서야 젊어서 굳이 '사서 하는' 고생은 만류하게 되었듯,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나서야 '애들은 놔두면 알아서 큰다'라든지 '저절로 큰다'는 말은 불신하게 되었다.
취지는 알겠지만, 아기들은 결코 알아서 크지 않고, 세상을 향해 눈을 뜬 순간부터 스물네 시간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부모는 처음이라' 투입해야 하는 정성과 희생이 옵션 아닌 필수로 요구되는 상황이 못내 당황스러우면서도, 우물쭈물할 시간 따윈 없다. 기저귀 갈기든, 배변 훈련이든 직접 겪어보고 부딪히면서 온몸으로 깨닫는 수밖에.
아기들이 백일 되던 무렵 하루 두어 시간이나마 공부할 시간을 얻어 슬금슬금 복학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고, 머잖아 다가오는 학기의 시간표를 짰다. 수강신청을 오랜만에 한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은 없었다. 인기 강좌를 선점하기엔 순발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청 직전에 바짝 다가오는 긴장감은 여전했다.
2학년 2학기부터는 변시 기초과목의 대부분을 정규 교과과정에서 이미 수강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상태로 시작하는 학기이다. 연습 과목을 수강하는 외에도 전 범위 사례형 문제라든가, 변시 기출문제 스터디를 조직해서 시간 안에 풀어보는 연습 등의 집중적인 연마가 필요하다.
정말 불가피하게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청했다. 평소 나는 평생을 뒷바라지해준 부모에게 육아 부담까지 드리는 건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다정하고 가정적인 성향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아이를 낳게 되면 나는 생업 전선에 뛰어들고 남편이 주양육자가 되기로 역할을 정해두었다.
그러나 로스쿨 과정의 절반을 남겨두고 아기 둘이 동시에 태어난 상황을 평소의 나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아기들은 그냥 놔둔다고 알아서 크기는커녕 가만히 있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기들 수에 맞게 보살펴줄 어른도 최소 두 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가 학교에 머무는 시간 동안의 둥이 육아는 남편을 주축으로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줄곧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께서 이를 외면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저 죄송한 마음으로 매일 아침 학교를 향했다.
독립한 가정으로서 일정한 소득 없는 외국인 남편과 '로스쿨생이라 쓰고 백수라 읽는' 나의 신분상 소득기준이 최하위로 분류되어, 가장 높은 수준의 정부 지원금을 받고 아이돌보미 선생님도 모실 수 있었다. 남편이 하루 두어 시간 원어민 강사로 일하며 최소한의 생계 활동을 유지하는 동안은 돌봄 선생님이 역할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세팅을 끝내고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아기들의 부모는 남편과 나라는 사실이다.
2학년 1학기까지의 나 또는 여느 로스쿨생처럼 오롯이 변시 대비책이라든지 공부 걱정만 하고 사는 일상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예방접종 일정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예약해서 남편과 동반해 아기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고, 저녁이면 집에 가서 아기들을 목욕시키고 자그마한 손톱을 조심스레 깎아주었다. 학기 중에만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해서, 방학기간은 공부시간을 더 줄이고 육아시간을 늘렸다.
평일 아침 8시 기상 스터디는 무조건 출석하되, 자율학습 시간이 지나면 열람실로 와서 앉자마자 기저귀나 분유, 식료품의 괜찮은 딜이 뜬 게 없는지 부지런히 검색하고 주문하는 일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무엇을 사든 가성비를 따지고, 천 원 할인쿠폰을 뒤늦게 발견하면 결재를 취소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어코 쿠폰을 적용해 다시 주문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즈음이다. 중고차를 사고 예정에 없던 이사를 두 번이나 하고 나니 경제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진 게 결정적이었다.
로스쿨 첫 학기에는 수업에 쓰는 교재나 변시 대비에 도움 된다는 기출해설집은 망설임 없이 결재 버튼을 눌렀지만, 복학하고 나서는 새 책을 주문하는 자체를 극도로 꺼리는 자신과 조우할 수 있었다. 수업에서 간혹 언급되는 책을 보고 싶은데 법전원 도서관에 비치돼 있지 않으면 희망도서를 신청하고 몇 주가 걸리든 기다리기도 했다.
시험을 앞둔 로3이 되면 많은 수험생들이 최신 판례나 출제 트렌드가 반영된 개정판 교재를 다시 구입한다.
나는 책을 늘리기 부담스럽다는 표면적 이유와, 실상 빠듯한 형편으로 말미암아 헌법을 제외하고는 변시까지 최신판으로 교재를 바꾼 적이 없다. 해마다 로스쿨 앞 기수가 치르는 변시 기간이 지나면 새것이나 다름없는 직전 연도의 핸드북이며 기출문제집이 우르르 폐품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내가 치르는 다음 해의 변시 대비에 필요한 거의 모든 교재를 이때 주워 담고는 교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시나 법전협 모의고사에서 최신 판례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2학년 2학기와 3학년 1학기에 각 수강하는 형사재판실무와 민사재판실무를 듣다 보면 변시 출제 가능성이 높은 최신 판례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기회가 주어지고, 그밖에 변시를 앞두고 적절한 최신판례 특강이 다발적으로 교내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너무 비현실적이야. 대중적으로 공감 얻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원칙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공부방법을 훗날 몇몇 주변인들의 물음에 설명해주었을 때 공통적으로 들었던 반응이다. 물론 주어진 자금이 넉넉하고, 수업을 마친 남은 일과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게 있었다면 인기강사의 현장 직강이나 최신 동영상 강의를 구매해서 듣는 데 인색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책값보다는 기저귀 값을 먼저 걱정하고, 간혹 공부가 잘되는 날에도 저녁이면 어김없이 집에 가서 아기들을 돌봐야 하는 복학생 아줌마의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매 학기 교과과정에 주력하고, 교내에서 진행하는 특강이나 멘토링 프로그램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없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