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델리러브 Jun 12. 2024

우리 집 거실 책상 논쟁

남편과 내가 대화를 오래 유지하지 힘든 이유

아이들도 커서 더 이상 읽지 않는 그림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거실이 답답해 보여'


우리 집 거실은 한쪽 벽면엔 소파와 장난감 수납장이, 맞은편 벽면엔 책꽂이와 3단 수납장이 하나 있다. 거실창쪽으론 아이들 칠판이 두 개 세워져 있는 풍경이다. 많다면 많을 수 있는 거실 가구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결혼 전부터, 내가 사는 집은 거실엔 책장을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조성되긴 힘들었다. 전에 살던 집은 좁았고, 6년째 살고 있는 집의 거실은 아이들 놀이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엔 책장이 두 개 있다. 장식장 겸 책장으로 된 5단 책장과 가로로 넓은 3칸으로 된 3단 책장. 문제는 그 책장엔 미닫이문이 있는데, 앞면으로 꽂을 수 있는 책장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구든 음식이든 뭐든 심플한 걸 좋아한다. 문짝이 달리지 않는 심플한 책장을 좋아하지만, 남편이 거실에 책장이 있으면 답답해 보인다고 해서 아이들용 책장을 찾다가 차선의 선택한 책장들이다. 원목이라 튼튼하고 무겁다.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가구처럼 깨끗하다. 나름 고가여서 상판 틀어짐도 없이 든든하게 책을 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클수록 그 미닫이가 달린 그 책장에 넣은 책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보단 안방에 둔 3단 책장 두 개를 연결한 그곳에 꽂힌 책들을 선호한다.  원래 3단 책장 하나는 거실에 있었다. 첫째 방을 꾸며주니 둘째가 자기 방을 꾸며달라며 거실에 있던 책장을 안방으로 옮긴 것이다. 안방에 있던 3단 책장을 연결해 안방 벽면을 책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이 읽는 책들은 안방 책장으로 옮겨지는 효과를 낳았고, 아이들은 안방에서 책을 읽거나 부엌 테이블로 가져와 책을 읽는다.


고가의 미닫이문이 달린 책장 두 개는 내 생각엔 우리 집 거실의 흉물이 되었다. 그 공간 앞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었고, 첫째만 자기가 읽는 책을 아주 가끔 꺼내와 읽는다. 초4가 된 첫째는 더 이상 유치한 책을 읽지 않는다며 전에 읽던 그림책 이하 초저용 도서는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초저용 도서는 7살 둘째가 읽게 되었고, 그림책은, 한때 우리 집에서 주가를 날리던 그림책은 이제 아이들의 세계에서 잊히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남편에게 말했다. 거실 책장을 다 치우고, 문이 안 달린 일반적인 책장으로 바꾸고 싶다고. 남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책장을 치우고 또 책장을 둔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남편에 책장은 그냥 다 같은 책장인 것이다. 나는 지금 있는 책이 문이 달려 불편할 뿐더러 주제별로 구분해서 책을 정리하기엔 한 칸 자체가 너무 넓고, 책장도 깊어서 책을 꺼내 읽기 불편한 디자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남편은 계속 동어반복만 할 뿐이다.


"책장을 치우고 또 책장은 둔다는 게...."


아뿔싸.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 년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에게 책장이란 그냥 다 같은 책장이 아니라고 설명한들 어떻게 이해할까. 내게 책장은 다 같은 책장이 아니다. 바로바로 꺼내서 읽을 수 있도록 정리가 가능하고, 상판의 두께가 어느 정도 돼서 튼튼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눈에 책목록을 구별해서 꽂아놓아 놓을 수 있는, 책을 꽂을 공간이 넉넉한 책장이 필요하다. 아이들 책도 이미 목록별 정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책을 꺼내 1인용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지금 우리 집 거실에 흉물처럼 놓여있어, 죽은 공간을 만든 거대 책장을 치우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오늘 새벽에 설거지하다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를 듣고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개념'의 문제이다. 인간은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개념을 통해 감정이 발생하는데 상대방이 가진 개념과 내가 가진 개념에 차이가 적다면, 대화가 더 쉽게 될 수 있다는 식(내 나름의 해석)으로 이해되는 강의였다. 우리는 왜 대화가 힘들까라는 주제에 대해, 결국 남편과 나는 왜 대화가 힘들까봐 대해 깨달은 것이다. 남편의 뇌에 착장한 책상의 개념과 내가 가진 책장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 개념이 공유되지 못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으므로,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다.


나는 지난번에 한 번 있었던, 책장 교체에 관련된 뜨거운 눈쟁을 떠올렸다. 그 논쟁 끝에 남편은 '알았어, 바꿔'라고 말했지만, 지금 이제 내가 책장을 빼겠다고 하니 논쟁이 다시 시작됐다. 그때 얘기한 건 남편이 나의 끈질긴 요구에 수긍하는 척을 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끔 있는 남편과 집에 가장 오래 있는 나, 이 둘에게 집의 인테리어를 꾸밀 수 있는 권리는 누가 더 클까? 이런 아쉬움을 남편에게 말해봤자 설득이 되지 않겠지만, 나는 여전히 답답하다. 답답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건 없다.


그냥 일단 책과 장난감을 버리기로 한다. 일단 버리자. 버리는 것만이 내 숨통이 하나씩 만들어진다고 상상한다. 언젠가는 바뀌겠지. 거실에 큰 테이블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직 하지도 못했다. 결국 이대로 이달 말까지 팽팽한 긴장감속에서 살게 될 것 같다. 하긴, 둘째 책상 놓을 자리를 두고도 얼마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는지 생각하면 말 꺼낸 나의 잘못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남편도 남편만의 개념이 있다. 남편은 오로지 디자인만을 본다. 예쁘면 좋다는 식이다. 나는 실용성을 기본으로 깔았다면, 남편은 자기만의 심미적 판단을 통해 소비한다. 나는 실용적이지 않은 모든 물건들을 혐오한다. 나이가 들수록 심플하고 단순한 게 좋다. 그렇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장난감을 다 처분할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집에 대한, 인테리어에 대한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화가 어려운 건 한 물건을 보고도 그에 대한 개념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국룰이란 말을 싫어한다. 그 단어 안엔 퉁쳐서 감정을 하나로 통일해 버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먹는 게 국룰이고, 이렇게 입는 게 국룰이고, 이런 인테리어가 국룰이라고 하는 말속엔 제국주의적이라고 말하면 좀 오버지만, 그런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먹는 방식도, 입는 방식도, 사는 모양새도 다 다른데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 집 가족들은 각자의 확고한 개념이 있어서 가끔 대화가 뒤틀리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쁜 건만은 아니다. 각자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걸 기본으로 한다는 의미인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거실에 있는 애물단지, 거대 책장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겠지만, 절충되어서 한놈만 살리거나 둘 다 폐기될 것 같다.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남편과 나의 대화이며, 아이들이라는 또 다른 산이 남아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책장에 이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남편이란 산맥보단 설득하긴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을 빈다. 도서관처럼 주제별, 작가별, 시리즈별로 책을 정리할 그날을!! 영화도 음악도 육아하다 다 끊겼는데, 유일하게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독서와 나는 더 친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동네 아줌마로 사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