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영화 글을 썼다
작년 12월, 한 영화 웹진에서 연락을 받아서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5개월 간 영화 글을 썼다. 비슷한 시기에 새 직장을 구한 것과 맞물려 개인적으로는 큰 변화였다. 짧게는 2000자에서 길게는 4000자의 글을 15편 정도 썼고, 웹진 오너이자 발행인과 1번의 오프라인 미팅을 했다. 처음에 의뢰를 받고 자축하는 기분은 제안 메일을 받았을 때가 최고조였다고 할 수 있다. 내 글을 읽은 소감, 앞으로의 프로젝트 계획, 고료에 대한 부분까지. 여러모로 뿌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직장에서 계약서를 쓸 때랑은 달리 통째로 팔려가는 느낌은 아니었고, 나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면서도 글 노동자로서 적잖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내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문학을 전공한 지라 그동안 집필 노동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몇 번의 업무 연락을 주고받았고 올해 1월부터는 경비 지원을 받아 영화관에 가고, 한 달에 두 편씩 마감 글을 내는 생활을 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커뮤니티에도 영화를 수천 편 본 씨네필들이 발에 채이는데, 나는 그렇게 광적으로 영화를 보지도, 한 영화를 프레임 단위로 외울 정도로 돌려보지도 않는 범상한 관객이었다. 그러다 생산하는 다급한 입장이 되니, 읽고 보는 무엇이든 재료이자 수렵, 채집 거리가 되었다. 주말 늦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사람 없는 썰렁한 동네 아트하우스에 후줄근한 차림으로 가서, 그쪽에서 예약해 준 개봉작을 본다. 한 번만 보고 4000자를 써야 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펜을 들고 무작정 무엇이든 휘갈겨 쓰고, 나와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쓰기 시작하면 보통 다음 날로 넘어가서 마감일 직전까지 회사 앞 카페에서 퇴고를 마치고 겨우 원고 하나를 전송하게 된다. 상대방은 내게 감사 인사와 친절한 감상평을 전해주고, 또 그것에 잠시 기뻐하다가 본업에 매몰되어 다시 일을 하고. 주말에 또 관람과 글 노동을 하고. 그렇게 5월이 왔다.
4월은 오스카 때문에 1편을 더 쓰느라 숨이 달렸고, 전주영화제에는 좀처럼 연차라도 쓰고 여유롭게 내려가고 싶었는데... 역시나, 오프라인으로 대체되었다(젠장). 학생 시절, 같은 영화제를 보러 전주에 가서 영화는 한두 편인가 보고 밤의 전주 거리를 걷다가 친구들하고 술을 먹고 잤던 기억이 있다. 나는 라디오헤드가 나오는 음악 영화 하나를 보았고, 여운을 머금고 다시 들어온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불던 서늘한 바람과, 밤거리에 빛나는 검은 기와들이 몇 년 동안 내 마음 속을 떠돌던 풍경이었다. 2021년에는 퇴근하고 웨이브(Waave)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영화를 보고, 다음 날은 리뷰를 쓰려니 고역이었다. 덕분에 남은 5월은 좀 쉴 수 있었다. 영화제 직후에 잠깐 블랙아웃이 왔다가 정신이 든 이 시점에, 지난 반년을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일단 몇 개월을 쓰면서 느낀 점은, 올해 개봉작에 한해서는 관람하는 숫자나 폭이 훨씬 넓어졌다. 이쪽에 대한 레이더가 켜져 있으니 영화제 주요 작품들은 놓치지 않고 보려는 욕심도 생겼다. 코아르는 영화계 소식에도 나보다 빠르고 기자들의 성향에 따라 적절히 개봉작들을 배분해주어서, 영화를 편식하던 내게는 좋은 기회이자 자극제였다. 또, 하늘이 무너져도 마감을 지켜내는 능력은 어쩌면 있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글이 잘 안 써져서 (보통은 내 마음에 별로 안 드는 영화일 때) 회사 앞 카페에서 빵을 물고 타자를 칠 때는 정말 괴롭긴 하다. 그렇지만 영화관을 나서면서 도대체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영화도 결국 어찌저찌 써내었다. 양쪽 일에 쫓겨서 퇴고를 급하게 하고 보낸 글도 물론 있으므로 15편의 글이 다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리 끙끙대다 손 놓고 만 글보다는 어떻게든 써서 방출한 글이 낫지 않는가 하는 위로를 스스로 해본다.
여기까지가 좋은 점이었고, 미진한 점에 대한 고민은 훨씬 크다. Eurofilm 시리즈도 마찬가지지만, 큰 틀에서 시리즈 기획을 하지 않다 보니 어떤 한 작품에 대해서 아마추어 수준으로 텍스트 분석+약간의 배경지식을 더하는 정도라는 한계를 느꼈다. 이런 식으로 쓰면 매번 글을 새로 쓸 때도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글과 글 사이가 전혀 연결되지 않고 흐름이 뚝 끊기게 된다. 외부 매체든, 개인 연재든 시리즈를 만들어야겠다는 압박감은 계속 들었고, 구상하고 영화 볼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동안 뭐 하고 살았니, 하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일단 위의 한계는 영화사와 영화학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늘상 그렇듯 나의 올드한 방식인) 책으로 채우면서 극복해나가려고 한다. 실제로 책을 몇 권 요청했더니 아주 흔쾌히 보내주겠다고 해서 고마웠다.
사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어떤 감독의 전체 필모를 조사하기 위해 초기작을 보고 싶다거나, 다른 레퍼런스들을 찾을 때 필요한 영화들은 공식적인 경로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글을 쓰기 이전에는 왓챠와 넷플릭스에 올라와있는 영화들만 찬찬히 골라서 봤고, 그 작품들만 해도 볼 것들은 넘쳐흐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너머에 어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힌 느낌이다.
마지막.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글쓰기 생활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 국내외 영화제 취재라든가, 감독 인터뷰라든가, 여러 가지 욕심나고 배우고 싶은 일들이 있다. 그때 가서 직장과 잘 병행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정도 해내면 잘한 것일 테다. 가끔은 본업의 미래보다 이쪽 일에 막연한 기대를 거는 나 자신을 볼 때 정말 대책이 없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물론 지금의 본업도 무척 사랑하고 있으나, 두 일은 내게 주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요즘 흔히 말하는 N잡러(겨우2잡러)라고는 하지만, 그 저변에는 숱한 갈림길과 불투명함이 있다. 이러다가 이도 저도 안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덤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영원히 모든 일을 똑같이 공평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 매 순간 조금 더 신경이 쓰이고 몰두하게 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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