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선물, 그 진한 감상
한 달에 딱 3만 원어치, 나의 기쁨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나절 만에 월급이 지나간 자리, 남은 몇만 원으로 내가 나일 수 있게, 나를 어여쁘게 돌봐줄 수 있거든요. 나에게 잘 해주는 나를 좋아해요!
매달 25일은 월급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은행 앱을 켜서 숫자의 길이가 늘어난 계좌를 확인한다. 그리고 힘을 내어 씩씩하게 월급 값을 한다. 그런 다음, 퇴근 후 침대에 걸터앉아 계좌를 비운다.
전세 자금 대출 이자, 관리비와 가스비, 몇 개의 적금들, 신용카드 2개의 카드값을 차례차례 이체하고 나면 계좌에 남은 숫자는 다섯 자를 넘지 않는다. 그중 3만 원, 딱 3만 원의 사치를 고민한다. 이번 달, 나에게 줄 3만 원어치의 선물은 무엇으로 할까?
소확행, 가심비 같은 단어가 이렇게 자주 쓰이기 전부터 나는 소확행이나 가심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한 덕분에, 늘 나를 위한 선물을 스스로 잘 챙겼다. 일주일 내내 술에 절어서도 1교시를 빼먹지 않은 나에게 주는 금요일 저녁의 치맥 선물, 중간고사를 치느라 고생한 나를 위한 원피스 선물, 감기를 잘 이겨낸 나를 위한 비싼 컵케이크 선물 같은 것들.
직장인이 되어 독립을 하자 벌이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좇으며 가심비를 즐길 여유가 오히려 줄었다. 야무지게 각종 세금이 떼어지고 입금되는 월급으로 한 달을 살고, 내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도 살아야 하니까.
칸칸이 진열된 세제 중 손에 먼저 집히는 걸 사는 대신, 병에 둘러진 라벨의 디자인이 가장 예쁜 파스타 소스를 사는 대신, 흰 가격표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인 100g 기준 가격이 더 저렴한 것을 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술 값, 배달 음식 비, 온라인 쇼핑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이만 원씩 쓰다 보면 백만 원에 다다르는 카드값의 이용내역에는 그 어떤 의미도, 감동도 없었다. 커피 4,100원, 비빔밥 7,500원, 배달 음식 16,000원, 마트 38,000원, 나의 한 달, 나의 생활을 이루는 것들에 말이다.
그러다 영화 <소공녀>를 보았다. 약속이 없는 화창한 일요일 낮, 침대에 반쯤 누워 본 영화였다. 그런 날씨의 그런 날에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정말 좋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취향,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와 담배를 위해 집,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포기하는 미소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은, 분명한 취향을 가진 내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월급 통장을 한 차례, 두 차례 비워가면서 내가 얻는 가장 확실한 행복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3만 원으로 정했다. 통장을 스치는 월급, 나의 지난 한 달에 대한 대가이자 앞으로의 한 달을 영위할 자금 중 딱 3만 원어치를 나에게 선물하기로. 3만 원으로 정한 이유는 딱히 없다. 1, 2만 원은 너무 짠 느낌이고 5만 원은 약간 과한 느낌이라 그 중간인 3만 원으로 정했다. 더불어, 나름의 룰도 정했다. 이 3만 원은 치킨을 시켜먹거나, 클렌징 폼을 사거나, 인스타그램 광고를 보고 홀린 듯 결제창까지 간 블라우스 같은 것에 사용하지 않기로. 그 무엇이든 내가 진정으로 기뻐하고 어여삐 여길 수 있는 것에 사용하기로. 다분히 주관적인 룰을 정했다.
가령, 우연히 들린 빈티지 샵에서 주인장이 일본 어디에선가 바잉해왔다는 멋스러운 파란색의 찻잔을 나에게 사준다. 2만 7천 원을 주고 산 이 찻잔은 아주 작아서 꿀을 듬뿍 넣어 차를 한 대접으로 마시는 나는 자주 꺼내어 쓸 일이 없다. 하지만 어디에 앉든 서든 주방이 보이는 나의 작은 집에서, 라면 냄비 옆에 가지런히 놓인 그 파란 찻잔에 눈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어떤 달에는 라넌큘러스 한 다발을 나에게 사준다. 10가지 분홍색의 라넌큘러스 꽃 10송이를 탁자에 올려두고는 아침에 눈을 떠 가장 먼저, 또 스탠드를 끄고 자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하루하루 꽃송이가 더 커지는 것을 관찰하며, 물과 햇빛만을 필요로 하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생물이 나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낀다.
외출이 어려운 어떤 달에는 나에게 3만 원어치의 술을 사준다. 술집에서는 안주 한 개와 소주 몇 병이면 금방 동나는 금액이지만 마트에서는 적당한 와인 두 병이나 위스키 한 병을 살 수 있다. '우리 집에 위스키 있음!'으로 친구들을 꼬셔 불러 모은다. 3만 원짜리 위스키 한 병에 모인 우리는, 3만 원보다 더 많은 돈으로 온 갖가지 배달음식을 시키고 캔맥주에 소주까지 사와 언제 해도 재미있는 세기 초의 이야기를 한다.
며칠 전에는 5월의 월급 중 3만 원을 모조리 나에게 책을 사주는 데에 썼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이 5천 원이라니 야호! 4권의 책을 쌓아두고는 '6월은 마침 1일이 월요일이네. 6월의 첫 번째 날, 6월의 첫 번째 월요일에는 어떤 책을 들고 출근길 지하철을 타지?’하는 고민이 즐거웠다. 내일의 출근은 한숨이 앞서지만, 어쩐지 빨리 6월 1일이 되어 새 책과 함께 출근하고 싶어 졌다. 출근길을 기대하게 만드는 새 책이 고마워 또 기뻐졌다.
나는 온전히 나를 위한 선물, 나의 작고 큰 사치, 한 달에 딱 3만 원을 이렇게 쓴다.
찻잔은 꺼내 쓸 일이 없고, 꽃은 일주일 만에 시들며, 술은 하룻밤에 동이 나고, 책은 금방 책장에 꽂히지만, 3만 원어치의 이 소비가 나에게 남기는 진한 감상은 한 달을 간다.
이번 달에 내가 나에게 선물 받은 책들을 다 읽을 때 즈음, 또 한 달의 서울살이며 업무며 사람이며 사랑에 지쳐갈 때 즈음의 어느 아침, 계좌의 숫자가 채워질 것이다. 물론 반나절 만에 계좌를 비워야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지만, 난 남은 몇 개의 숫자로라도 행복한 고민을 할거다. 이번 달, 나에게 줄 3만 원어치의 선물은 무엇으로 할까? 적어도 나는 나에게 잘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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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다가올 한 달이 벌써 힘들게 느껴지신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만 원을 스스로에게 써보시면 좋겠다. 6월은 장미의 계절이니까, 장미 한 다발? 여름을 함께 보낼, 예쁜 맥주잔이나 무소음 선풍기도 좋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