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t yet Oct 09. 2024

미끈거리는 유혹.



그 흔한 비누.


엄마는 흔한 클렌징 제품을 두고 비누로 세안했다. 피부 속 좋은 유분까지 다 빠진다고 잔소리를 해봤지만 들은 척 만 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피부가 나보다 훨씬 좋았다. 스킨로션은 아모레, 몸살감기엔 판콜에이, 피곤할 땐 박카스, 비누는 살구 비누. 엄마의 취향은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LG 온더바디 비누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가업을 물려받듯 뒤를 이어 나도 비누족이 되었다. 세안뿐만 아니라 목욕할 때도 마음에 드는 비누를 골라 쓴다. 바디워시를 쓰면 피부가 뻣뻣해지고 세제로 샤워하는 기분이 든다.


물론 엄마가 쓰는 것과 달리 제법 가격이 있는 오가닉 제품들이다. 그런데도 가끔씩 엄마표 살구 비누로 세안을 해본다. 뽀드득뽀드득 기름기가 쏙 빠지듯 개운한 느낌이 좋다. 이런 맛에 엄마는 바디워시를 두고 천 원 남짓한 비누를 고집했나 보다.




에리제론 올인원 비건 샴푸볼 



여담이지만 쥐가 좋아하는 게 치즈가 아니라 비누라고 한다. 꼬꼬마 시절 마당 수돗가에 놓아둔 비누에 갉아먹은 것 같은 이빨 자국을 본 기억이 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지 그랬는데, 생쥐였던 거다. 이제라도 녀석에게 한 마디 건네고 싶어진다. '먹지 말고 피부에 양보하세요.'


매달 물건너 다니던 시절,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트렁크 한가득 동그랗고 네모난 고체들을 모셔 온다. 무게가 나가다 보니 다른 것들을 사 올 수 없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르 쁘띠 마르세이에 시어버터 솝



몇 년 전 뉴욕 여행의 마지막 날 있었던 이야기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를 찾아가 비장한 마음으로 비누 털이를 시작했다. 클로징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매장 안은 한산했지만 얼른 사서 나가주길 바라는 직원들의 뜨거운 시선이 뒤통수를 따라다녔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동물용인지 사람용인지 정도만 구분해 빠르게 장바구니를 채웠다. 계산대에서 직원이 비누 몇 개를 들고 샬라샬라 했는데 흡사 랩을 하듯 지나가는 단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 나중에 집에 와서 살펴보면 되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만사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그때 사 온 비누는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고도 5년은 족히 쓸 양이었다. 매일 오늘 뭐 먹지를 고민하듯, 뭐로 씻을지를 고민하며 신나게 쓰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 이거 쓰려고 봤는데 발 무좀에 좋은 비누래’.


어머나, 멀쩡한 친구 얼굴에 없던 균도 다 죽일 뻔한 거다. 어떤 친구에게는 설거지 비누를 주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지금은 비누로 설거지를 한다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살짝 문화적 충격이었다.







엄마의 진득한 취향처럼 비누를 향한 나의 진심은 결국 브랜드를 만드는 일까지 이어졌다. 올해 디쉬바를 시작으로 사람용 동물용 혹은 무좀용까지 가리지 않고 만들 작정이다. 그날의 쇼핑 실수가 오늘의 일을 만들어 준 거다. 친구는 그때 일을 기억하며 네가 만든 설거지 비누로 세수 해도 되냐며 놀리기도 한다.


고대 시대에도 비누가 있었는데 지금과는 달리 상당히 비싼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전통 방식으로 기름에 양잿물을 섞으면 비누가 되는데, 요즘은 서양에서 온 잿물이라는 말 대신 가성소다 혹은 수산화나트륨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 먹으면 죽는 거 아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에 쉽게 녹기 때문에 적당한 양을 사용하는 건 문제가 안되지만 생쥐처럼 갉아 먹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인류의 수명을 20년이나 늘리고, 가장 많은 인류를 구한 물품 1위가 비누라는 말도 있다. 일리도 있는 것이, 매일 손발을 씻게 되면서 여러 감염과 질병 전염률이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이쯤이면 비누는 인류를 구한 진정한 슈퍼 히어로가 아닐까.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도 비누가 은근 떠오른다. 미끈하게 빠진게 천상 비누스럽다.


꾹꾹 눌러 쓰는 제품과는 다르게 닳아가는 게 보이니 아쉽고,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여러 종류의 브랜드와 가격이 좀 있는 수제 비누도 써봤지만, 가격과 상관없이 마지막까지 아껴 쓰는 비누가 있다.


주로 고소한 향을 지닌 아이들인데, 나와 비누결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과즙 향이 가득한 것도 좋지만, 코코넛이나 아몬드같이 다정한 향기에 쉽게 피부를 내어주고 만다. 버터처럼 체온에 쉽사리 녹아버릴 것 같은 연약한 고체 덩어리다.


뉴욕 여행 중 만난 '시어모이스쳐(Shea Moisture)' 비누다. 수제 비누는 아니지만 나쁜 성분을 최소화한 유기농 제품이다. 아직 국내에는 판매되지 않아 구매대행으로 구입해 쟁여놓고 쓰고 있다. 버터를 냉장고에 쌓아두는 것과 같은 고소한 마음이라고 해두자.


시어모이스쳐 비누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종류는 '코코넛 오일 셰어버터(230g)'인데 100% 버진 코코넛 오일로 만들었다. 쓸 때 마다 욕실 가득 부드럽고 다정한 향기가 난다.


그 다음으로 즐겨 쓰는 비누는 '아프칸 블랙'인데 여드름이나 트러블에 좋은 제품이다. 얼마나 마음에 들면 국내에 런칭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싶다. 얼마면 되니?




시어모이스쳐 아프칸 블랙 비누 바



나뭇잎이 떨어지기 무섭게 친애하는 겨울씨가 찾아왔다. 겨울이 길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가끔씩 머릿속이 복잡하고 흙탕물에 뒹굴다 온 것처럼 텁텁한 날이 있다. 진피 속 땟국물까지 씻어낼 비누의 울트라 파워가 필요한 순간이다.


비라도 오려는지 오늘따라 짙은 스산함이 피부결을 스친다. 따뜻하게 목욕물 받아놓고 멜랑꼴리한 음악도 틀어야겠다. 지친 몸을 푹 담그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묵은 마음의 때도 벗겨 내야지.


바야흐로 비누의 계절이 돌아왔다. 미끈미끈 비누 닳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지금 나는 순해지려고 노력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