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eday Jan 21. 2020

CH.04 해피 뉴 서핑

“새해 첫날의 해를 보겠다고 굳이 동해까지 달려가는 거, 조금 번거롭지 않아?” 퉁명스럽게 말하던 20대 초반의 나는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그 해를 검은 쫄쫄이를 입은 채 바다 위에 떠서 보게 될 줄은 말이죠.

1월 1일, 몇몇의 서퍼들은 파도 위에서 해를 맞이합니다. 해가 뜨기 전 어둑어둑한 시간부터 검은 겨울 슈트를 입은 채 각자의 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하곤, 레저 법상 일출 30분 전부터 입수가 가능하기 때문에 준비를 하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지역 주민과 관광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가 깨지지 않는 라인업으로 나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손을 잡습니다. 저 멀리 첫 해가 떠오릅니다. 올해에도 좋은 파도를 안전하고 즐겁게 탈 수 있길 기원하며 물을 첨벙첨벙 서로에게 뿌립니다.

작년 양양 죽도 해변 일출 행사에서는 진행요원 서퍼들이 플라스틱을 엮어 만든 부표를 끌고 입수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몸이 아파 참여를 하지 못해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정초부터 아프다니.. 나이가 들었습니다.) 부표엔 ‘Plastic Free Seas’로 파타고니아와 함께 하는 환경 보호 캠페인 메시지가 적혀있었죠. 


꽤 오랫동안 서퍼들은 그들과 함께 바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여왔습니다. 일출 행사에서는 개인용 텀블러와 머그잔을 지참하고 행사가 끝난 뒤엔 바다를 청소합니다. 쓰레기를 줍고 바다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앞장서는 것은 파도를 내어주는 바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감사의 표현이며, 해를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식입니다.

바다도 새해를 맞아 기분이 좋았는지, 파도를 선물로 주는 날이면 바다로 나간 서퍼들이 좀체 해변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파도가 솟아오를 때마다 수면을 가르며 달렸고, 뜻밖의 볼거리를 얻은 갤러리들은 연신 감탄을 내뱉습니다. 쾅하고 부서진 파도 거품 사이에서 살아남은 서퍼들이 그제야 해변으로 걸어 나옵니다.


어떤 해에는 행사를 위해 모래사장에 야외 사우나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몸을 벌벌 떨던 서퍼들이 일제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이전에도 말했듯, 겨울 서핑은 역시 춥습니다. 하하.

행사가 끝나갈 무렵엔 다 함께 모여 떡국을 먹습니다. 새해부터 문을 연 서핑숍에서 끓이기도 하고, 마을 주민 분들이 한 솥 끓여 나눠주시기도 합니다.


끝나는 해의 마지막 파도와 시작하는 해의 첫 번째 파도, 어제의 파도와 오늘의 파도를 함께 나눈 동지들이 모여 떡국을 먹고 있자니 가족과 함께 보내는 명절 같은 따스함이 전해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친구이자 동지이자 가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일출 서핑을 마친 친구가 떡국을 호로록 마시며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날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보내잖아.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순간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거든…. 그런데 이런 날 나는 바다에 있어.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같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날에 있고 싶은 곳은 파도 위, 하고 싶은 것은 서핑,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나와 같은 서퍼들입니다. 그것이 바다 위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당신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합니다. 올해 나는 꽤 많은 소원을 빌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계획 중 하나이지요.


작년의 나는 서핑 인생(?)중 가장 마음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파도에게서 많은 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고 했으나, 사실 서핑에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욕심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려고 하는 서핑 때문에 오히려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 무너진 마음을 다시 행복한 서핑으로 채우는 것도 올해의 소원이자 계획입니다. 너무 좋아해서 너무 힘들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길게 다뤄볼게요.


나도 당신도 바라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는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해피 뉴 이어.



2017년 1월 1일

바다 위에서 서른을 맞이했다. 추웠고 따뜻했다. 나의 첫 일출이었다.


2018년 12월 31일

창밖에 새해가 도착하기까지 23시간이 남았다. 시간과 계절에 기억이 마구 섞여, 매해 이때쯤 무엇을 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서핑을 시작한 후론 어쨌든 바다에 있다. 올해의 마지막 파도와 내년의 첫 파도를 타겠다며 그렇게 바다의 시작과 끝에 있다.


2019년 1월 1일

2019년의 첫 번째 해가 떴고 올해도 어김없이 서퍼들은 바다로 나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CH.03 파도에 밀려오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