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보나 Jul 11. 2023

02. 3초의 파노라마

할머니 삶에는 한 편의 청춘 하이틴 로맨스가 있었다.

- 공부하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일하게 돼버렸네. 슬프지 않앤?

- 아쉽긴허주. 경해도 일하난 돈벌어지곡. 그 돈 어멍 가져다주고 하는 게 신나서. 어멍도 쓰러져나난 일해져? 나가 가져다준 돈에 어멍이 여기저기 솔짜기 일하멍 번 돈으로 구멍가게 열었져. 어멍이 허리에 전대차고 구멍가게에서 일하는 거 보는디 잘도 뿌듯해라.


그 시절 가녀장이었다. 할머니는 본인이 물질해서 번 돈을 보태서 어머니의 구멍가게를 열어주었다. 쓰러졌던 어머니를 밖에서 일하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 대단하다이. 그 구멍가게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 이서?

- 나는 계속 물질하러 가부난 모르는디, 그 구멍가게에서 일하던 어멍하면 기억에 남는 건 있지. 글은 몰라도 잘도 똑똑한 사람이었던 거 닮아.


할머니의 어머니는 한글을 쓸 줄 몰랐다고 했다. 구멍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이 셈에만 빠삭하면되지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싶었다.


- 글 읽을 줄 몰라도 계산만 할 줄 알면 되는거 아니?

- 막 외상하는 사람들이 이서부난 그거 적잰하믄 한글도 알아사주게. 내가 한글은 쓸 줄 아는디 물질하래 가부난 가게에 내가 항상 있지 못해나서.


맞다. 그 시절에는 바로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외상 장부였던 것이다. 특히나 시골 구멍가게에서는 서로 얼굴을 아는 이웃이기에 외상으로 물건을 가지고 가고 나중에 돈이 들어오면 갚는 식의 신뢰를 바탕으로 가게를 운영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그런 구멍가게를 적자에 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꼼꼼하게 외상장부를 작성해야 했다. 누가 얼마를 가져갔다라는 것을 기록해야 하는 데 안타깝게도 사장님이 가장 중요한 ‘누가’를 쓰지 못했다.


- 그럼 어떵핸?

- 나도 그걸 모르켜게. 그 장부는 어멍만 읽을 수 이서났져. 어멍 대신 가게 보는 날에도 외상하는 사람 외상 갚는 사람 다 왔져게. 그 때마다 장부에 10전은 긴 막대로 1전은 짧은 막대로 표시한 건 나도 읽어지컹게. 겐디 누가 그만치 가져간건지 알아지나게. 일단 받거나 물건 준 다음에 어멍신디 알동네 누궤가 이거 줍디다 골았주. 어멍이 집마다 금액을 외운 건지 어느 쪽에 어멍만 아는 표시를 써신 지 아무튼 외운 거 닮아. 나가 말하난 막대로 표시하고 지우고 해라. 아무튼 나는 도와주잰해도 도와줄 수가 어서나서.

- 장사는 잘 된?

- 시골 구멍가게 난 필요한거 사래 사람들이 종종 왔져.


두 딸은 물질을 하고 어머니는 가게를 살뜰히 운영하면서 세 모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며 살았다. 그동안 할머니의 어머니는 재가하셔서 할머니의 다른 형제를 낳으셨다. 어머니의 재가에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냐고 물어봤지만 시집 갈만큼 장성한 딸은 어머니의 연애보다는 자기의 연애에 바빴던 것 같다. 시집을 가버려서 새 아버지와 산 기간이 길지 않다고 했다.


- 그럼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어떻게 만난? 어른들끼리 소개해준 거?

- 소개가 무신 거라? 느네 할아방은 옆집 살았져.

- 뭐? 옆집? 그럼 할머니 옆집 오빠랑 결혼한 거? 아니 이거 무슨 드라마야?

- 어릴 때부터 옆집 살멍 다 보고 컸주. 소학교도 같이 다니곡.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 같은 금능리에 살았다고 하니 얼굴을 몰랐을 리는 없고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어른들끼리 혼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뭐, 보통의 시대극에서 보면 그러던데... 어릴 때 정략 결혼하고 뭐 그런거.... 그런데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오랜 서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옆집에 한 살 많은 오빠가 산다? 외모는 훈훈한데 조용하고 말 수 없는? 은근히 챙겨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놀다가 어느 순간 막 남자로 여자로 보이고 뭐 그런.... 이건 뭐 사극에서 하이틴 청춘물로의 빠른 장르 전환이었다. 아니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옆집은 물리적인 거리만으로도 드라마 설정으로 완벽하다고...


- 우리 할아버지 박해일 닮았잖아! 금능리에서 엄청 눈에 띄었을 거 같은데? 누가 먼저 좋아했어?

- 먼저 좋아하고 이런 거 어서 났져. 결혼할 때 옆에 보이난 한거주.

- 아니 무슨 보쌈해 오는 것도 아니고. 옆에 보이니까 결혼하는 건 말도 안돼잖아. 진짜 옆집에서 같이 크면서 아무 감정도 없었다고?

- 오게 어서났져. 그 사람이 워낙 말 수도 없고 하난 화나신가행 말도 잘 못하크라라. 하나 기억나는 건 있져. 그땐 일본어를 잘하는 게 중요한 시절이어신디 느네 할아방이 한자를 잘해. 경허난 일본어도 잘하곡. 나가 모르는 일본어 물어보래가믄 일본어 가르쳐주고 경허긴 했져.

- 아~ 그게 멋있었어? 설렜겠네? 솔직히 말해봐, 할머니가 먼저 좋아했구나?

- !!!!!!!


내가 능구렁이처럼 묻는 말에 할머니의 당황하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 그대로 동공지진. 갈색 눈동자가 아차하는 순간 흔들리는데 너무 귀여웠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같이 놀리는 재미가 있었겠다, 싶었다. 물론 우리 할아버지라면 기침 한 번 하고 머쓱해하며 그 자리를 피했겠지만.


- (3초 지연) 아니여게. 무신거 멋있어? (3초 지연) 술푸대기. 술 경 하영 마시는 사람인 줄 알아시믄 결혼 안 해실 거여.


할머니의 3초 지연이 오랜 시간과 오랜 마음들을 설명해 줬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 속 우리 할아버지는 너무 현대적인 외모였다. 키가 170 센티미터 중반대로 또래 할아버지들과 서 있으면 홀로 우뚝 서 있었는데 늘 고개를 약간 숙이고 45도 아래를 보고 있었다. 키보다도 기억에 남는 건 30대인 아빠의 배는 볼록했는데 할아버지는 60대인데도 배가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늘씬했다는 것이다. 모델같이 긴 팔과 긴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 할아버지가 우리를 가로로 눕혀서 등에 짊어진 자세로 들고 걸을 때에는 높은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느껴졌었다. 무릎을 많이 구부리지 않고 걸어서 그런지 휘적휘적 걷는 느낌이 강했다. 무상의 가로로 긴 눈을 가진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박해일이 은교로 노인 분장을 했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우리 할아버지는 은교의 박해일만큼 늙어보질 못했다. 67세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박해일 닮았겠다!


아무튼 그런 눈에 띄는 외모의 오빠가 나는 어려워서 알지도 못하는 한자도 잘 척척 읽고 일본어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고? 항상 마주치는 옆집에 산다고? 어린 시절부터 옆집이었으면 같이 놀았을 테고 학교 가는 길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매일 등하교를 같아했겠지? 분명 할머니의 3초 지연 속에는 차마 손녀딸에게는 말하기 쑥스러운 살짝 그립기도 한 오랜 설렘의 시간이 함축되어 있는 듯했다. 그 시간 속에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힘들었던 삶에서 하나의 기쁨이었던 할아버지와의 서사도 있을 테고 풋풋한 첫사랑의 마음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젊은 소녀에 대한 사랑스러움도,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읜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서 씩씩하게 잘 이겨낸 자신의 삶에 대한 기특함도 있을 것이다. 그게 할머니의 머릿속을 3초 동안 파노라마가 되어 한 장 한 장 넘어갔을 것이다.


- 그럼 그렇게 결혼한 거야? 결말 완전 꽉 막힌 행복한 결말이다. 할머니는 근데 왜 그렇게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혼내기만 한 거야? 둘이 왜 그렇게 싸운 거야?

- 아이고 나 너네 할아방 경 술 하영 먹는 사람인지 알아시냐. 맨날 물질행 왕 지쳥 자고 일어낭 물질허래가곡. 나가 잘 몰라부난 너네 할아방이랑 결혼했주.


옆 집에 살면서 볼 거 다 보고 알 거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옆집 오빠에 대해서 결혼하자마자 할머니가 새롭게 알게 된 건, 남편의 간경화였다.


작가의 이전글 01. 할머니는 어떵하당 해녀가 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