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흥미로운 단어를 하나 알았다. Fernweh라는, 먼 곳을 향한 동경, 멀리 떠나고 싶은 갈망을 의미하는 독일어다.
향수병과 의미가 반대인 이 단어를 처음 본 순간, 오랫동안 품었지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던 마음속 불꽃에 이름이 생긴 것 같았다. 천성적으로 향수병이 없는 나는 학창시절 수련회에 가면 왜 촛불의식이라는 오컬트적인 행사를 열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는지, 그러면 왜 아이들은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 년 동안 미국에 있었을 때도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가는 학생들을 보면 '굳이?'라고 생각했다.
Fernweh병에 걸린 내가 직장까지 관두고 온 대만에서 굳이 한국 사람을 친구로 사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네이버 대만 커뮤니티에 “가까이 사는 한국 사람들끼리 맥주나 한잔하죠”라는 글이 올라와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만에서 처음 한국인을 만난 게 중국어 학원에서였다. 선생님이 학원에 다른 한국인도 있는데 알고 있느냐며 쉬는 시간에 그녀를 소개시켜줬다. 나보다 일고여덟 살 어린 대학생이었다.
이렇게 안면을 트게 된 이상, 밥이라도 한 끼 해야 할 것 같아서 수업이 끝나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삼각형 모양의 주먹밥과 미소국이 나오는 일본 식당이었다. 그 애는 강렬한 대만 자외선에 얼굴도 타지 않았는지 피부가 하얬고 볼 위엔 주근깨가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렸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했다. 밥알도 하나씩 신중하게 씹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나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 기준을 통과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함께 식사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카페에 갔다. 그 애는 라떼를 맛있게 마셨는데,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애가 카페인에 예민해서 커피를 거의 안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도 됐을 텐데, 배려랄까 조심스러움이랄까 그런 게 몸에 밴 아이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내 마음의 빗장이 풀어졌다. 그 애는 다음 달부터는 펑지아대학교 어학당에 다닐 거라고 했다. 나와 계획이 같았다. 우리는 같은 날 어학당 레벨 테스트를 봤고 이후에도 종종 점심을 함께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이었다. 그 애와 친한 다른 한국 애가 어학당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데 시간이 되면 오라고 했다. ‘괜히 어색할 것 같은데. 딱히 친한 사람도 없고’라는 마음과 ‘그래봐야 서너 시간이잖아. 아는 얼굴도 분명 있을 거야’ 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외국에서 명절이나 기념일을 보내면 아무리 노력해도 가을 아침 찬바람 같은 쓸쓸함을 완전히 몰아내기 힘들다. 그래서였을까, 어색한 건 질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기대였는지 당일 오후가 되어서야 가기로 결심을 하고 부랴부랴 선물을 챙겨서 파티 장소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는데, 그날 그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과 친해져서 방과 후 함께 점심을 먹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를 떠나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때였다.
그들과 어울렸던 것은 단지 정말로 그들이 좋아서였기 때문이지 향수병이나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언젠가 같이 먹은 비빔밥처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비빔밥의 고명처럼 성격, 취향, 배경, 나이가 다 달라서 좋았던 점은 회사나 학교 사람들과 있을 때와 달리 비교하는 마음을 덜 가져도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흰쌀밥처럼 대체로 선한 사람들이었고 빨간 고추장처럼 자발적으로 이국에 오게 된 고민을 공유하고 있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 중 두 명이 원룸 계약이 끝나 큰 집으로 합치면서 우리는 그곳을 아지트 삼아 더 자주 모이게 되었다. 만나면 주로 밥을 먹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편안하고 즐거워서 언젠간 이 생활이 끝난다는 게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만에 들어온 시기가 비슷한 우리는 떠나는 시기도 비슷했다. 코로나로 인해 항공편이 크게 줄어서 버스를 타고 타오위안 공항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이별 장소는 늘 타이중 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떠나는 사람이 늘수록 배웅하는 사람은 줄었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나였는데 마지막 배웅을 하고 집에 돌아온 날에는 참을 수 없는 공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누군가 심장에서 모래를 한줌씩 퍼내는 것 같아서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았다.
그들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스치듯 같은 상처를 발견하는 것으로, 현재를 불만하고 이상을 동경하는 마음을 이해받는 것으로 위로와 애잔함을 느끼면서 그들을 나의 작은 분신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응원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응원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은 모두 흩어져 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서로에게 쉽게 잊히지 않은 거라고 믿는다. 어디선가 문득 서로를 떠올리며 진심으로 응원할 거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