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키 큰 여자로 산다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내 키는 178cm로 대한민국 여자 키 상위 3%에 드는 수치다. 오차 범위 ±1cm를 감안하더라도 보통 여자들 사이에선 단연 독보적이라 말할 수 있는 키다. 처음부터 내 키가 이렇게 큰 건 아니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의 또래들보다 키가 큰 축에 속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는 초등학생으로,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중학생으로, 중학교에 다닐 때는 고등학생으로,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성인으로 착각하는 해프닝은 내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초등학생 때 나의 키 번호는 늘 끝 번호에 가까운 십 대 후반에 머무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엔 언제나 나보다 키가 큰 두세 명의 아이들이 나의 뒤에 줄을 서곤 했었다. 나는 그 사실에 내심 안도를 하곤 했다. 내 뒤에 아무도 없는 끝 번호가 되어 운동장을 달리는 일은 왠지 모르게 퍽 외롭고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그 아이들을 추월하게 된 건 바로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올라가던 해였다. 163cm에 불과했던 내 키는 겨울방학 동안 무려 7cm나 자라 170cm의 키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 결과 나의 양 무릎엔 그물 모양의 튼 살이 흔적으로 남게 되었고, 예전과 달리 내 뒤엔 더 이상 아무도 서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전교에 몇 없는 키 큰 여자아이가 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키가 그렇게 크고 나니 나는 나의 일상 속에서 의도치 않은 주목을 받기 일쑤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말 잡스러운 일에도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나서야만 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내려야 할 때, 천장에 달린 에어컨 버튼을 꺼야 할 때, 피구 공격 순서를 정해야 할 때, 심지어는 어느 반이 먼저 수행평가를 볼지 정할 때에도 반에서 제일 키 큰 아이였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서야만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170cm였던 내 키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173cm가 되었고,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175cm가 되고 말았다. 운동장 조회 시 친구와 같은 장난을 쳐도 혼자만 튀어 선생님께 걸린다든지, 교문에서 하는 복장 검사에 번번이 걸린다든지 하는 일도 내겐 역시나 당연한 일이 될 수밖엔 없었다.
언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등교 시간을 넘겨 지각을 한 나는 나 말고 지각을 한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는 체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당시 173cm에 50kg가 나가던 나는 저혈압이 심해서 남들과 달리 그 행위를 반복하는데 무리가 있었고, 당연 남들처럼 제대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각을 한 인원들이 상당했기에 나는 그들 틈에 묻혀 얼추 선생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의 안일한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들 각자 땅에 내려놓은 책가방을 챙겨 반으로 들어가려 하던 그때였다. 팔짱을 낀 생활 지도 선생님이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뚜벅뚜벅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는 내 앞에 서더니 체벌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당장 본인의 눈앞에서 하라고 소리쳤다. 그 선생님은 평소에도 앙칼진 목소리로 학생들을 대놓고 지적하는 악명 높은 선생님이었다. 갑자기 떨어진 불호령에 책가방을 챙기던 다른 학생들도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것이 다 느껴졌다.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선생님은 바로 앞에서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시야가 흐려지고, 숨이 가빠와도 힘겹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할 수밖엔 없었다.
이윽고 나의 체력에 한계가 오고, 텅 빈 운동장에 나만 이 행위를 지속한다는 억울함과 부당함에 눈물이 나왔다. 나의 눈물을 본 선생님은 이내 당황한 얼굴로 나의 행위를 멈추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은 내게 “너 배구부 아니야?”라는 아주 근본 없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저 배구부 아니에요.”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을 쥐어짜 내었다. “그래?” 내 대답을 들은 그 선생님의 얼굴에 자신이 틀렸다는 민망함과 머쓱함의 표정이 금세 그려졌다. 나는 그제야 겨우 교실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그렇다. 그 선생님은 단지 내가 키가 크다는 사실만으로 자기 맘대로 배구부인 줄 넘겨짚었고, 내가 배구부임에도 불구하고 잔꾀를 부려 체벌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괘씸했던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만약 평균 키의 여학생이었다면? 다른 이들의 틈 속에서 그렇게 눈에 띄는 일도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배구부’라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173cm 키를 가진 열다섯 소녀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던 건 고작 자신의 오해를 부정하는 대답 그것 하나뿐.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