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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Nov 11. 2020

나의 이상한 소비


로망이란 뭐랄까, 한 번쯤 해보고는 싶은데 당장 실행할 만큼 갈급하지 않은 소망 같다. 내 로망은 세 가지다. 첫째는, 홈웨어를 사는 것이고, 둘째는 집에 쓰레기통을 두는 거고, 마지막은 검은색 고무장갑을 구매하는 것이다. 나도 안다. 별거 아니라는 거. 그렇지만 돈을 쓰려고 하면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잠옷이야 밖에 못 입고 나갈 만큼 헌 옷이 널리고 널렸는데, 집에서 입는 옷에 돈을 쓰려니 망설여졌다. 내겐 목이 가슴께까지 늘어난 여러 벌의 옷과, '사회과학대', '봉사 동아리'라고 쓰여 있는 단체티가 있다. 그걸 돌려 입기만 해도 홈웨어는 걱정이 없다.


쓰레기통도 비슷한 이유다. 쓰레기는 봉투에 담아서 베란다에 두면 그만이다. 쓰레기통이 왜 필요하겠는가. 고무장갑은 핫핑크색 요란한 장갑이 아니라, 검은색의 단정한 걸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천 원이면 집 근처에서도 사는 걸, 굳이 생활용품점까지 가서 삼천 원 돈을 주고 사 오기가 아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식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배달 음식 두 번만 덜 먹었으면, 잠옷이나 쓰레기통은 진작에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항상 비슷한 식이다. 돈을 차근히 모아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보다는, 몇 번의 당일치기 여행과 국내 여행으로 돈을 탕진하고 만다. 터미널에서 파는 저렴한 옷을 구매하고, 보풀이 일어나고 해지면 금세 옷을 버린다. 머리로는 ‘가격보다는 취향을 고려해서 질 좋은 물건을 사야지.’ 생각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저렴한 쪽을 택한다. 비싸고 좋은 물건은 일단 다음 집에 살 때, 혹은 월급이 오르면 구매하겠노라 유예한다.(가장 큰 아이러니는 저렴한 물건을 하도 많이 사서, 결국 비싸고 좋은 물건 하나를 사는 것과 비슷한 돈이 든다는 것이다.)



홈웨어, 쓰레기통, 그리고 검정 고무장갑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 구매를 미루고 또 미루다가, 이사를 하며 드디어 지갑을 열었다. 처음 구매해본 잠옷은 하늘색 반팔 잠옷이다. 입은 듯 안 입은 듯한 촉감이 좋다. 소재는 찰랑찰랑과 보드라움 그 사이에 있다. 샤워한 후 잠옷을 입고 선풍기 바람 앞에 앉으니, 잠옷 사이로 바람이 시원하게 통해서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쓰레기통은 분리수거용, 일반쓰레기용 두 개를 구매했다. 분리수거통은 페트병과 캔을 나눠 버릴 수 있고, 색깔은 옅은 베이지색이라 방 안에 두어도 미관을 해치지 않는다. 예전엔 쓰레기를 배출하기 전까지 베란다가 쓰레기 밭이었는데 이젠 쓰레기통이 있으니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뚜껑 덕에 벌레가 꼬이지 않고 냄새도 덜 난다.


검은색 고무장갑은 핫핑크 고무장갑처럼 주방에서 홀로 튀는 법이 없다. 마침 주방 타일의 짙은 회색과도 잘 어울린다. 소매 끝에 고리가 달려 사용 후엔 걸이에 걸어 물기를 말리기 좋다. 비싸지 않은 돈을 들였는데 만족도가 높다. 이런 게 사치라면 좀 더 자주 사치를 부려도 좋을 것 같다.


왜 여태 안 샀을까? 잠옷을 입을 때마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설거지할 때마다 "진작 살 걸 그랬다."라고 중얼거린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있으면 삶의 질이 상승한다. 대단한 기쁨을 주지는 않지만, 사용할 때마다 작은 즐거움을 준다. 잠옷을 입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사는 데 지장이 없어서 잠시 미뤄두었던 내 로망들을 최대한 많이 이뤄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여름에 이사를 와서,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여름 잠옷은 밤에 추워서 못 입겠다. 이젠 긴 팔 잠옷을 한 벌 마련해야 하나 싶다가도, 이상하게 막상 잠옷을 사려면 또 돈이 아까워서 사지 못하는 중이다. 사면 분명히 좋을 걸 알면서도, 외식 대신 집밥 한 번 먹으면 아낄 수 있는 가격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긴 팔 잠옷을 장만하기까지는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는 긴팔 잠옷 두 벌을 마련했습니다. 지금도 포근한 긴팔 잠옷을 입고 있어요. 역시 사길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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