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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혼부 연예인과 결혼했다 23

정말 엄마가 되고 싶은 걸까?

by 장정윤

나는 항상 생각했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인연이 없다면 안 해도 그만, 그러나 아이는 꼭 하나 갖고 싶다고.


워낙 아이를 좋아했다. 어렸던 초등학교 때에도 사촌동생들이 그렇게 예뻤고 잘 돌봤다. 엄마와 이모들은 정윤이는 유치원 선생님을 하면 잘하겠다고 자주 말했다. 그래서 한 때 유치원 선생님을 꿈꾼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안 하길 잘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이들이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유치원 선생님이 된다기엔 너무 많은 책임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조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그날도 잊지 못한다. 2010년이니까 막내 작가에서 막 벗어난 작가 2~3년 차 시절이었다. 오후쯤 조카가 태어났다고 연락을 받고는 빨리 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선배 언니들이 퇴근을 해야 나도 퇴근을 하는데... 이미 내가 할 일은 끝났는데, 조카가 태어나서 먼저 가보겠다는 말도 못 하고 혼자 속으로 씩씩거리며 엉덩이가 무거운 선배들을 잠깐 미워했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8월의 여름이었다. 드디어 퇴근을 하고 택시를 타고 을지로에 있는 병원으로 가 조카를 처음 보았다. 사실상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정도로 쪼글쪼글한 얼굴을 보고도 가슴이 벅찼다. 새언니에게 힘들지 않았느냐 고생했겠다 말하니 새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애 낳을만해요!" 그러고는 화장실을 가겠다고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쓰러졌다. 오빠가 부축하고 있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후 새언니가 승무원이라 비행을 나갈 때마다 조카는 우리 집에 맡겨졌다. 아빠는 조카를 위해 오랫동안 피우면 담배를 끊었고 엄마는 조카를 위해서 기꺼이 본인의 시간을 할애했다. 나도 매일 조카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조카바보의 면모를 뽐냈다. 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지갑이 가벼워졌다. 아이들의 물건이 어른들의 물건보다 비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조카가 걷고, 말하는 등 그 과정을 보며 무수히 많은 기쁨을 얻었다. 일 때문에 또는 연애 때문에 힘든 나날들을 조카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자주 위로받았다. 웃어도 예쁘고 울어도 예뻤다. 조카가 12살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행 얘기는 뒤에 다시 하겠지만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오빠네 가족을 보러 최근에 여행 겸 독일을 다녀왔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자주 보지 못한 조카는 그 사이 키가 나보다 컸고 영어도 제법 잘하는 멋진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어쩐지 내가 조금 작아진 느낌도 들어 잠시 거리감도 느꼈다. 여러 가지로 스스로 위축된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시차 적응과 여행에 대한 고단함에 소파에 자주 누워있었는데 조카는 그런 내게 다가와 가만히 나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나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갑자기 감동의 눈물이 왈칵 났다. 티 내지 않으려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또 고모는 여전히 예전처럼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말하자 내 품을 파고들었다. 조카를 통해 내 존재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키만 컸지 아직 애기구나 안도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거 같다. 나와 조카가 너무나 사랑하는 모습을 며칠을 지켜보던 승현은 말했다. 조카도 이렇게 예쁜데 우리 자식이 태어나면 얼마나 예뻐할 거야.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고모부 승현와 조카 재인 in paris



다시 하려던 얘기로 돌아와 나는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한치의 고민도 없었다.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면 뭐하러 결혼을 하나 연애나 하고 살지, 그런 생각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적도 있다. 반성한다, 또 그런 말로 상처받았을 딩크족 친구들에게 사과한다. 내가 막상 결혼하고 한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보니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예민하다고 하면 예민한 성격의 나는 사실 승현이 크게 잘못한 게 없음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럴 거면 저 남자는 왜 결혼을 했지? 싶을 정도로 승현은 공사다망했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친해지고 만남을 유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기에 나는 똑같은 말을 두세 번 했지만 그는 고쳐지지 않았다. 여자의 감성을 세심하게 헤아리지 못하는 편이었다. 나의 불만은 그런 것들이었다. 별일 아니라고 하면 별일 아니고 크다고 하면 큰 부분. 나는 승현의 장점만 생각하자, 마음먹었지만 종종 쌓아두었던 감정이 터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싸웠다. 승현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했고 나는 그냥 모든 게 싫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이를 정말 꼭 가져야 할까? 승현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주위에선 낳아 놓으면 다 키우게 된다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이 정말 싫었기에 나는 나중에 절대로 아이 앞에서 싸우지 않으리라 성장하는 과정에 내내 다짐했는데... 아마도 우린 싸울 것이고 아이에게 상처를 줄 것이란 게 눈에 보였다.


싸우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은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했다. 갑자기 부산으로,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줄 서서 맛있는 걸 먹고 전시회를 즐기기도 했다. 하루 종일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뒤적거리며 누워있었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었다. 친구들도 자유롭게 만났다. 남편이 공사다망한 탓에 나는 시간이 자유로웠고 일까지 그만둔 백수라 낮이고 밤이고 시간 되는 대로 친구들을 만났다. 문득 이 평화로움이 행복하기도 했다. 인생이 이렇게만 흘러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긴다면 이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승현은 당연히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혼자 몰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른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인생 또한 중요하기에. 남자들과 다르게 여자들은 아이를 가지면 모든 게 올스톱되기에.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이 아직 있는데 아이로 인해 2~3년 미뤄지다 보면 결국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게 되리란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하루하루 오랫동안 진지하게 내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승현과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차츰 두려움은 용기로 변했다. 나와 승현이 좋은 부모가 될 것인지에 대한 의심도 믿음으로 변해갔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아이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아이로 키운다면 그보다 보람된 일이 어딨을까 생각했다. 아이가 있는 친구들은 말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세상 처음 느껴보는 행복감이 있다고. 키우는 과정도 힘들지만 그만큼 기쁨이 있다고. 위로가 된다고. 조카가 떠올랐다. 그렇지, 맞지.


이왕이면 아이를 적극적으로 가져보기로 하고 병원을 찾았다. 인공수정을 2~3번 해보고 안되면 시험관을 하기로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첫 번째 인공수정에 실패했고 승현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든든하고도 좀 어설픈 보호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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