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에 친한 언니를 보기로 했다. 내게 "가혜야, 앞으로 널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가족일 거야."라고 무시무시한 고통의 예고편을 담담히 건넸던 바로 그 호주언니. 언니는 10년 전쯤 나보다 먼저 이혼의 혼란함을 겪었고, 극복했고, 재혼까지 한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던 시기였으나 마음 편히 털어놓고, 위로받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언니뿐이었으니 언니만은 만나고 싶었다. 또 어떤 미래를 예견해 줄지 살짝 기대도 되면서 말이다.
오늘은 언니의 남편과 함께 만난다. (이니셜을 따 KB라고 부르겠다.) 언니 부부는 연상연하 커플이고 KB는 나와 동갑이다. 우리는 성격이 매우 비슷해서 언니는 나보고 여자 KB라 부른다. 호주에 있을 때 셋이 자주 만났고, 둘의 결혼식을 위해 호주로 날아가 사회도 보고 신혼여행도 같이 갔던 지라 KB와는 여러모로 잘 통하고 편한 사이다.
오랜만에 보는 KB는 활짝 웃으며, 이혼 얘기 들었다고, 잘했다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금방 좋은 남자 만나서 재혼 소식을 들려줄 거 같다는 말로 유쾌한 위로도 건넸다.
언니의 이혼을 지켜보며 KB 또한 이혼 과정이나 그 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수다를 떨며 안부를 묻고, 맛있는 파스타를 먹고, 많이 웃었다.
한바탕 근황 토크를 하고, 슬슬 나와 (전)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흘렀다.
여태껏 아무리 남편이 못난 행동을 했어도 남들에게 말할 땐 일정 선을 지켰다. 누가 뭐래도 내 남편이니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었달까? 남편 욕해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아니까 맥락상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 해버렸다. 둘한테는 해도 될 거 같았다. 그런데, 둘의 반응이 의외였다.
언니가 내 얘기를 듣고 말했다.
"그런 행동이 잘못된 건 맞아. 나쁘게 몰려면 얼마든지 나쁘게 몰 수 있는데, 또 지극히 일반적인 남자로 보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돌싱에 KB보다 7살 많다는 이유로 그의 부모님은 둘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헤어질 뻔했지만, 끝내 둘은 부부가 되었다. 내가 봐도 둘의 사랑은 강력했고 또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고 못 살던 둘 역시 가족이 되고 함께 살기 시작하니 살벌하게 싸웠다고 한다.
KB도 평소엔 젠틀하지만, 화가 나면 자기도 주체를 못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내가 경멸하는 전 남편의 행동을 KB도 여러 번 했다는 거다.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깨부순 적도 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남편 욕을 한 건데 마치 그를 욕하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으니까.
언니도 초기에는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렸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나 머리끝까지 화나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남편을 그렇게 분노케 하는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됐다는 거다.
"네가 말한 그 모든 것들이 충분히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분명 함께 살 방법이 있을 수도 있는 것들이야."
언니의 말을 듣고 KB가 그때의 억울함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아니, 잘못은 같이했는데, 맨날 자기 말이 다 맞다는 거야. 난 답답해서 미칠 거 같은데! 그렇다고 남자들처럼 치고받고 싸워서 풀 수도 없고. 내가 참다가 폭발하면 결국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까 맨날 나만 나쁜 놈 되는 거야."
KB의 심정을 들으니 이혼 전 남편이 자주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래, 또 내 잘못이지? 말 안 한 내 잘못, 욕한 내 잘못.”
나도 미숙했던 점이 많지만 싸움의 끝에선 늘 그가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의 나쁜 점은 가려지고 그의 나쁜 점만 부각됐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잘못은 같이 했는데 문제는 늘 자기한테 있다고 하니 말이다.
“난 한 번도 제대로 수용받은 적이 없어.”
뭔가를 얘기하면 한 번에 '응, 네 말이 맞아.' 하는 법이 없고, 다 내 생각과 의견이 있었다. 항시 내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설명이 있는, 이런 내가 지긋지긋했겠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듯한 그 사고방식과 태도가 남편을 옥죄었을 수도.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에서 국민 불륜남이 된 극 중 박해준 배우의 엄마가 아들의 바람에 대해 김희애를 탓하며 한 말이 있다.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가는 너랑 사느라 내 아들도 고단했다. 태오가 오죽했으면 그래. 네가 숨 쉴 틈만 줬어도 한눈 안 팔았어.”
물론 바람의 원인을 배우자에게 돌리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저 할머니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KB의 얘길 듣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나랑 살면서 숨 막혔을까? 바늘 하나만큼도 수용받지 못한다고 느꼈을까?'
수용받은 적 없다는 말마저도 '난 네 말을 최대한 수용해 주려고 노력하는 데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며 수용하지 않았다. 조금만 남편의 입장에서 진심을 다해 들으려 했으면 이해할 수 있던 말인데, 나는 왜 그렇게 남편의 말을 경청하지 못했을까. 내 안의 정답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옳았을까. 남녀 사이에 논리 따위 아무 소용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모르면서 뭐 그리 잘났다고 나의 주장과 논리를 고집한 걸까.
남편도 참 고단했겠다. KB처럼 미칠 듯이 답답했겠다.
언니 얘길 빌리면, 여성의 학력이 높은 나라일수록 이혼율이 높다고 한다. 자기가 잘난 여자는 남자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배우자가 행복하지 않으면 당연히 나도 행복할 수 없는 거겠지.
"존경받지 못하는 남자는 행복할 수 없어. 가정에 산은 하나여야 해. 남자의 의견에 힘이 있어야 가정이 편안한 거야."
언니 말이 맞다. 남자라는 동물은 본디 존경받아야 행복하게 만들어졌고, 여자라는 동물은 사랑받아야 행복하게 설계됐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남편을 존경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 거일 수도 있다. 존경받지 못하는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겠나. 나는 남편의 낮은 자존감을 탓하며 책도 읽게 하고 공부도 시켰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게 아니라 낮추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걔가 못나고 부족하니 내가 감싸줘야지.' 이런 생각으론 다시 시작할 꿈도 꾸지 마. 내가 못나서 이 지경이 됐다고 백 프로 인정이 될 때, 그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지난주 형부와의 대화에 이어 둘과의 대화로 나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간파한 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혼하게 된 게 '내 잘못이라고 인정이 되는 것.' 이게 키포인트인 듯했다.
'남자들이 가장 꺼려하는 여자는 깨달은 여자다.'라는 우스갯소리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가방끈도 길고, 책도 많이 읽고, 흔히 말하는 깨달은 게 많은 여자였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헛똑똑이였다. 알량한 배움으로 그에게 아는 척을 하고 가르치려 한 나의 행동과 처세술은 빵점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잘나서, 아니 잘난 줄 착각해서 남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만 했지 포용하지 못했다.
부부상담을 하고 관련 책을 읽으며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존경할 만한 행동을 안 하는 데 어떻게 존경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그게 그 당시 나의 그릇이었던 거다. 존경할 점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게으르고, 칠칠맞고, 제멋대로인 나와 살아주는 거 자체가 존경스러운 거였다. 내가 멋대로 대학원을 그만둔 뒤, 3년 가까이 혼자 외벌이를 하고 있는 것도 존경해 마땅한 거였다.
인정과 칭찬은 존경의 다른 이름이다. '칭찬을 잘하게 될 때까진 결혼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듯 배우자를 인정하고 북돋아 주는 건 결혼생활에서 필수적인 일이었고, 윤활유이자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였다.
나는 남편에게 인정의 말을 자주 해줬어야 했다. 그는 자신과 달리 너무 자유로운 나와 사느라 많은 것을 포기했다. 나를 배려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거였을 텐데 내가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니 가만히 있어도 분노 게이지가 차올랐을 거다. 이때 내가 칭찬과 인정의 말로 그 게이지를 낮춰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남편의 분노는 자꾸만 넘쳤을 거다. 나는 그 넘침으로 인해 나오는 폭력성을 보며 자꾸 남편을 탓했다.
KB가 그의 마음을 대변해서 말해줬다. 그가 막말과 폭언이 먼저 나가는 건 턱끝까지 불만이 차 있기 때문이고, 말을 안 하고 분노 게이지를 쌓는 건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사이가 좋을 땐 날 사랑하고 행복하니 쌓이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분노하는 상황이 되면 그제야 인식하게 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오늘도 나의 부족함과 오만함이 우리 이혼에 크게 기여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그의 폭력성이 온전히 나의 부족함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혼 초부터 그랬으니 그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기질도 무시할 순 없겠지. 하지만, 하지만, 내가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그를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의기소침해진 나의 표정을 읽어서인지 KB는 자기가 내 입장이라면 도망갈 거 같다고 했다. 그와 맞추며 사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험난할 게 뻔하다며. 자존감 낮은 사람과 사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고 했다. 쉽게 상처받고 기분 상하는 일이 많으니 더 조심해야 하고, 두 배로 배려하고, 항상 눈치 봐야 한다고. 자기는 그렇게 못 산다고 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KB여서 그런지 그의 말이 나의 죄책감을 한 움큼 덜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둘과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 나는 혼자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는 결국 남편에게 카톡을 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