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는 오빠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기 전까진 절대 오빠를 떠나지 않을 거야. 오빠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이 세상에 없었어. 내 남은 인생은 오빠를 위해 살 거야."
이 무슨 삼류 인터넷 소설에 나올 거 같은 대사인가, '내가 글을 잘 못 클릭했나?' 생각하실 거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과 10여 년 전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내가 직접 내뱉었던 대사이다.
25살 여름, 호주의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수영 좀 할 줄 안다며 깊은 바다에서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죽기 직전에 구조됐다. 저 절절한 대사의 주인공, 당시 이름도 제대로 모르던 남자에 의해서 말이다.
원래 사랑할 땐 한 번도 이별하지 않은 것처럼 온 마음 다하자는 주의지만, 내 목숨을 살려준 오빠는 더욱이 목숨 바쳐 사랑했다. 대학원 전공으로 면역학, 그것도 바이러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그가 갖고 있던 바이러스성 난치병 때문이라고 하면 믿으려나?
그렇게나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이런 운명적 사랑조차 식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했다. 도대체 어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는 건지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더욱이 그 사랑이 식어가던 과정과 싸울 때 오갔던 말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강렬하던 기억도 다른 사랑을 시작하고, 결혼까지 하니 어느덧 다 잊혔었는데, 형부의 말을 듣고 불현듯 떠올라 버린 거다.
"너, 나랑 다툴 때 네가 날 얼마나 벌레 보듯 보는지 모르지?
그리고 그 표정이 날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모르지?"
전 남자친구가 오래전 했던 말이 마치 (전)남편이 하는 말처럼 귓가에 생생히 맴돌았다. 그리고 저 말은 마치 '남편을 화나게 한 건 네 잘못이야.'라며 나를 탓하는 것 같았다.
형부 말이 맞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 다르듯 욕하고 화내는 것이 내 기준 최악의 행동이라면, 누군가에겐 그보단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이 더 최악일 수 있다. 욕이 그저 기분 나쁘고 말 일이라면, 무시가 담긴 차디찬 눈빛은 사람의 자존감을 단번에 무너뜨릴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 중 송강호의 이성을 잃게 만든 것이 냄새나고 더럽다는 듯 코를 막고 인상을 쓰는 고 이선균의 조용한 경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전 연재에서 물리적 폭력보다 언어폭력이 더 나쁠 수도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물리적 상처는 상처가 아물면 그만일지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가슴에 남아, 성장 과정에서 영향을 주고 트라우마를 만들어 한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에겐 욕보다 멸시하는 듯한 눈빛, 한심하다는 듯 내쉬는 한숨이 훨씬 감당하기 힘든 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여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 선과 악, 호와 불을 남편에게 강요해 왔던 거 같다. 욕은 나쁜 행동이니까 넌 나쁜 사람, 경멸의 눈초리는 화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난 정상인 사람, 그렇게 남편을 내 기준에 따라 낙인찍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겐 언어폭력이네 뭐네 말 조심하라 했으면서 내 눈빛은 전혀 조심하지 않았다. 아주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주말에 형부와의 대화로 마음이 좀 심란해졌다.
내가 잘못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깨닫고 나니 남편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 '이번엔 진짜 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간질간질 피어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남편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나도 노력해야 하지만 큰 문제는 남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보듬고 기회를 주는 거라고. 하지만 형부와 대화를 나눈 뒤 생각이 바뀌었다.
남편을 그렇게 만든 건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달라진다면 잘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표가 생긴 후로는 마음이 계속 흔들렸다. 갈팡질팡. 우왕좌왕. 엎치락뒤치락.
엄마의 병시중만 아니었어도 당장 대전으로 내려가, 미안하다며 남편을 꼭 안아주고 다시 잘해보자 했을 거 같다. 평소 하던 말처럼 '안 되는 게 어딨어, 되게 하면 되지!'라며 다시 또 헤쳐나가 보자고 그를 설득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복잡해하던 중 갑자기 아랫배가 아프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보니 그날이 시작됐다. 가끔 남편에게 평소 안 내던 짜증이나 화를 내고 나면 며칠 뒤, 혹은 다음 주쯤 생리를 시작하곤 했다. 그제서야 '아, PMS(월경 전 증후군) 같은 거였구나!' 깨닫는 거다. 지난 일요일 남편의 행동에 꺼지라고 소리치고 이혼을 결심한 것도 혹시 PMS에 의한 충동적인 감정 조절 장애 아니었을까?
그런 의구심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의심은 사라졌다. 간절한 마음으로 임신 준비를 해왔음에도 순간적으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임신이 안 돼서 너무 다행이다!'였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면 나는 지금 분명 아쉬워야 했다. 그와의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어야 했다.
아이가 유산됐을 때 나보다 더 슬퍼했던 그이라서, 아이가 생긴 걸 알면 분명 그도 마음을 돌리고 잘해보자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난 임신이 안 된 게 너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가 자꾸 유산된 이유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혼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TV에 나오는 이혼 위기 부부의 모습을 보며 아이를 낳는다고 문제 행동이 개선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지만 나이 때문에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결심은 했으나 아이를 낳으면 아이 때문에 참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은 아이를 계획하면서도 끝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오랜 시간 겪어오며 익숙해져서 그렇지 이런저런 우려와 걱정, 반복되는 실망과 절망에 나의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 거 같다. 지난주 남편의 행동은 작은 시발점이 되었을 뿐 이렇게 된 건 예정된 수순이지 않았을까.
생리가 시작됐음을 알게 된 그 짧은 순간에 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다시 또 방향을 잡아가는 듯했다.
이혼을 망설이는 사람들의 고민은 다들 비슷할 거다.
우린 정말 맞춰갈 수 없는 사이일까? vs 서로 노력하면 바뀔 수 있는 관계일까?
나중에 이혼한 것을 후회할까? vs 잘했다고 생각할까?
한 번 더 노력해 보면 어떨까? vs 여태껏 한 노력으로 이미 충분한가?
다들 이 정도는 참고 감내하며 사는 걸까? vs 지금이라도 새로 시작하는 게 맞는 걸까?
순간의 충동적인 감정일까? vs 오래 고민해도 똑같은 결과일까?
다들 이런 끝나지 않는 고민을 하다가 별거 아닌 거에 웃고, 다신 안 그러겠다는 말을 또다시 믿어보기로 하면서 그렇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며 10년, 20년 살아가는 거 아닐까.
한편으론 그렇게 미워하고 동시에 사랑하며 사는 게 부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정답은 없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한 가지를 정해서 살아보지 않으면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니까. 나는 2년간 '끝내는 게 맞을까? 감싸안아 주는 게 맞을까?' 고민했지만 늘 '감싸안아 줘.'를 택해왔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해보는 게 맞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별거를 해보니 그 결과가 조금은 보인다. 이혼을 결심하고 홀로서기를 계획한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 늘 불안정하던 삶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앞으로의 미래가 깜깜한 것은 맞지만 이전처럼 근간이 흔들려 주저앉게 되진 않았다.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하나씩 이뤄 나가면 될 뿐 남편의 기분과 반응에 따라 나의 하루와 계획이 계속 무너지고 뒤집어지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며칠간 마음이 혼란스러우니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하루 종일 무기력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바로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마음 약해지지 말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마치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 며칠 뒤 또다시 나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만남이 생겼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