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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고 했다

by 온호류



"나 28일에 (대전)갈까 하는데 시간 어때?"


(전)남편에게 이 카톡을 보내기 전, 여러 이야기를 썼다가 지웠다.

'자니...?'를 쓰고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지우기도 하고, 형부와 KB를 만난 후 깨달은 것들과 미안한 마음에 대해 끄적여보기도 했다. 그러다 이혼하기로 한 마당에 구질구질하게 뭔 말이 많나 생각이 들어 모두 지워버리곤 딱 할 말만 남겼다. 그리고 괜히 말을 걸었다. 28일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상태였지만 괜스레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 그의 안부가 궁금해진 거다.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답이 없었다. 그는 나와 달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 이미 잠이 든 듯했다. 그런데 메시지 옆에 사라지지 않는 1을 바라보고 있자니 굉장히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선택권이 하나도 없는 기분. 문득 '남편은 항상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결혼 초, 남편이 이혼하자는 얘길 자주 했지만 진정으로 원해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조금만 달래주면 자긴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며 시치미를 떼곤 했으니까. 그가 화나서 토라지면 먼저 사과하는 건 늘 내 쪽이었다. 그는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법이 없었으니 그의 사과를 기다리다 지쳐 먼저 손 내미는 게 일상이었다. 얼핏 보기엔 그가 나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나는 늘 선택권을 갖고 있었다. 내가 손을 놓고자 하면 언제든 놓을 수 있는 그런 상태였달까. 그저 매 순간 조금 더 노력해 보기로 결정하고 그를 달래주기로 선택한 것뿐이었다.


2022년 1월 1일 처음 이혼하기로 합의했을 때부턴 대놓고 선택권을 내세웠다. 남편이 이혼하자고 한 것을 수락하고 며칠 뒤, 그가 미안하다며 싹싹 빌었지만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간 상담실에서 오열하는 그를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딱 1년만 상담받아 보자며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이후로 올해 다시 이혼하기까지 2년간 꽤 많은 이혼 얘기를 꺼냈다.


"이럴 거면 왜 잡았어? 그때랑 변한 게 없잖아!"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럼, 왜 달라지는 게 없는데?"

"우린 어차피 똑같을 거야. 그냥 지금이라도 끝내자."


돌아보면 참 야속한 말을 많이 했다. 나도 똑같았으면서 변하지 않는 그를 나무랐고, 이럴 거면 그냥 이혼하자고 내가 가진 선택권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남편은 언제고 내가 원하면 이혼을 당해야 하는 그런 입장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겨우 카톡 하나에 대한 반응 가지고도 이렇게 무력감이 드는데, 그는 계속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기 삶의 선택권이 자신이 아닌 나에게 있는 상태로 몇 년을 살아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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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겐 다음 날 아침에 연락이 왔고, 아무래도 얼굴 보고 얘기해야 이 복잡한 마음이 정리될 거 같아서 나는 주말에 시간 되면 잠깐 보자고 제안했다. 도의적 핑계를 대서 그런지 다행히 남편도 흔쾌히 보자고 했다. 마침, 다음 날 서울에 온다길래 당장 내일 버스터미널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2024년 3월 16일 토요일

(전)남편을 만난 날 (남이 되기까지 D-46)



카페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남편이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경태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생각보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경태에게 살짝 마음이 상한 듯했다. 그의 표정은 몹시 차가웠다. 그의 별칭인 액체질소처럼.


그의 이름이 내 핸드폰에 '액체질소'로 저장되어 있는 건 화가 나면 너무나도 냉랭해지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액체질소는 -196도로 드라이아이스보다 두 배는 더 차갑다. 그는 사랑이 넘치다가도 화가 나면 순식간에 얼어붙은 저런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얼음송곳 같은 말로 나를 찔렀다. 액체질소에 넣는 순간 무엇이든 급속 냉각 되는 걸 생각하면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없었다.


겉도는 안부를 묻고 잠시 침묵한 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왜 자기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제야 알 거 같다며 여태껏 그가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억울함과 수치심에 목이 메듯 떨리는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남편이 이렇게 울먹일 줄 몰랐다. 물론 그에게 미안한 것들이 떠오르긴 했으나 울 정도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간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충과 아픔도 참 많았겠다는 걸 떨리는 목소리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우린 이혼 결정에 흔들림이 없는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금방 헤어졌다.

아직 실감은 안 나지만 우린 이제 완전히 끝났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비우고 왔으나, 그의 단호한 태도에 잘 됐다 싶으면서도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는 여태껏 자기가 받은 취급에 대해서만 부들부들 떨며 얘기했다. 늘 자기가 받은 거, 당한 거에 대해서만 먼저 생각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다 틀린 건 아니었다. 내가 대학원을 그만두고 2년 넘게 자기 혼자 요리하고 돈도 버느라 자기는 내 식모 같았단다. 그리고 내가 그의 가족들을 무시했단다. 다녀온 지 1년 넘은 가족여행에서 느꼈던 서운함을 이제야 얘기하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내가 그의 가족들을 존중했나? 생각하면 아니다. 너무 편하게 생각했다. 남편이 자길 하찮게 여겼다는데, 그게 아니라 그도 그냥 가족처럼 생각했다. 가족처럼 한없이 편하게.


남편도 직장에선 천사표지만 나한테만 그렇게 폭언을 했던 이유는 내가 가족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우리 둘 다 마음속에 가족과의 약속은 좀 미뤄도 늦어져도 상관없는 거였고, 가족은 남들한테는 안 보이는 못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기본을 망각하고 있던 거다.


그는 친한 동생과 내가 예전에 싸운 얘기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사람을 몰아붙이는지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남편의 마음은 이랬을까 저랬을까, 내가 부족했던 것들만 생각났는데, 그는 자신이 억울한 것과 나의 단점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얘기는 없었다. 오히려 미안하지 않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차이가 우리를 그토록 싸우게 만든 이유 같기도 하다.


그는 배려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니까 날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 거다. 그에겐 욕먹을 짓을 했으면 욕을 먹어야 하는 거였다. 욕먹을 짓이 맞는지,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상대방이 왜 그랬을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분 나쁜 순간 모든 게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 난 이게 너무 힘들었다. 싸움이 있고 나면 나는 남편에게 상처받은 내 마음도 챙기고 남편 마음도 달래줘야 했다. 남편은 내 마음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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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부터 그의 폭력성이나 욕설을 보면서 기본이 안 된 사람이라는 인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거 같다. 그래서 우리 관계의 결정권은 늘 내가 가지고 있었고, 무의식중에 그와 나를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내가 위에 있는 관계, 내가 감싸주고 있는 관계라는 생각을 해왔던 거 같다. 어떻게 보면 모든 불화의 원인은 그런 내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경하지 못하도록 막은 걸지도.


오늘 그의 얘기를 듣고 강렬하게 든 하나의 생각은, 그는 나를 벗어나야 한다는 거였다. 나랑 살면 그의 자존감은 더욱 곤두박질칠 게 뻔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안주하고 싶어 하는 남편과 날아가고 싶은 나. 우린 서로의 앞길을 닦아주는 관계가 아닌 서로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존재였다. 대학원을 그만둘 당시 자신감 넘치던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삐걱대는 관계에 신경 쓰느라 에너지를 뺏기면서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속터져했다.

이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던 족쇄가 끊어졌으니 나는 당장 날아올라야 한다. 지금 날지 못하면, 날개도 없는 주제에 남편 때문에 못 나는 거라고 거짓말을 해온 지지리 못난 여편네가 될지도 모른다.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뚜렷해지니 이혼이란 게 이제야 피부에 와닿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진짜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내게 남은 것은 얼마 없는 돈과 반려견 경태, 그리고 나의 가능성뿐이었다. 가진 날개를 믿고 일단 날아보는 수밖에, 그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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