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 남편의 단호한 태도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의 흔들림은 없다고, 이젠 내 앞길만 생각하겠다고.
지금의 나는 10년간 해온 전공 공부도, 결혼도 다 중간에 포기했으니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건 당장의 일시적인 평가일 뿐이다. 미래에 내가 새로운 적성을 찾아서 즐겁고 보람 있게 일한다면, 결이 맞는 사람과 재혼해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한다면, 지금의 선택은 실패가 아니라 가장 잘한 일로 평가될 수도 있다.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직시하고 개선해서 다시 시작하면, 지금의 위기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족스러운 삶으로 이끄는 기회로 작용할 거다.
결심이 단단히 선 나는 우리 결혼식의 사회를 봐준 친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 소식을 전했다.
동생은 나의 결심을 지지하면서도 크게 아쉬워했다. 나도 똑같이 아쉬운 마음이라며, 지금도 여전히 갈팡질팡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화났을 때 돌변하는 그의 태도와 기분 상하면 자기만 생각하고 멋대로 구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다고 했더니, 동생은 말했다.
"언니, 오빠가 화났을 때 오빠 생각만 하는 건, 화나지 않았을 때 언니 생각만 하기 때문일 거야."
동생의 말이 너무 정확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 자기가 없고 '나'와 '우리'만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분노는 마치 자식한테 올인하고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럴 수 있어?" 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았을 거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원했던 게 아닌데도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희생해 오다가, 그걸 몰라주니 그 배신감에 쉽게 분노가 일었던 건지도.
"오빠는 감정적인 사람인데, 언니가 감정을 봐주는 게 아니라 오빠의 행동이 옳고 그른가를 먼저 판단하고, '맞는 말'로 오빠를 압박하니까 그런 대응 방식이 오빠를 더 화나게 했을 거야."
싸울 때는 옳고 그름이나 논리를 따지기보다 일단은 감정이 상한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먼저다. 감정이 어루만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소리는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올곧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기분이 한껏 나빠져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시간 낭비다.
머리로는 너무 잘 알지만, 내가 가장 못하는 부분이다. 남편의 화를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이런 것에 불같이 화를 내는 그의 태도를 경멸하게 된다. 지난 연재에서 말했듯 나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여러 감정 중 '버럭이'를 가장 싫어했다. 누군가 불같이 화를 내는 순간 나의 공감 능력은 사이코패스급으로 낮아지는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형부의 말처럼 공감받지 못한 분노는 폭발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화낼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이어갔다. 그가 분노하지 않을 때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잘 아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대화가 그렇게 흐르지 않았나 싶다.
"둘 다 미숙했지만, 그래도 오빠가 잘못한 거 맞아. 아무리 화난다 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됐어."
지난 토요일, 카페에서 본 그의 비통하고 억울한 듯한 태도는 "진짜 내 잘못인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했다. 내 잘못이라는 그의 말에 가스라이팅 되듯, 정말 내가 잘못해 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까지 하다고 얘기하자. 동생은 단호하게 내 편을 들어주었다. 숙모가 한 말을 전해주며 쐐기를 박기도 했다.
"남자를 고를 땐 이성적으로 괜찮은 사람을 골라야지 모성애가 느껴지는 사람을 고르면 안 된대. 언니는 결혼 초부터 오빠를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했잖아. 잘 결정했어."
맞다. 나에게 남편은 내가 보듬고 품어줘야 하는 아들과도 같았다.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식 준비를 할 때부터, 신혼여행을 가서 이혼하자며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겠단 그를 말릴 때부터 그랬다. 예복을 맞추러 가는 길에 우린 싸웠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거리에 서서 한참을 어르고 달래 겨우 그의 발걸음을 돌리며 이 결혼을 하는 게 맞을까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이혼했어야 했는데...'.
이제 보니 웃기게도 우린 서로를 딸처럼 아들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나면 안하무인이 되는 그를 내놓기 부끄러운 아들 보듯 했고, 그도 나를 생각 없는 철부지 딸처럼 여겼다. 10년간 해온 공부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며 그만둬버리고는, 돈도 안 벌면서 책 보고 공부만 하니 그의 입장에선 딸을 키우는 거 같았을 수도 있다. 그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홀로 짊어졌다는 부분에선 백번 칭찬해도 부족하지만, 나는 결혼 생활 5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에게 의지해본 적이 없었다. 툭하면 돌변하는 그의 태도로 나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판 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통화를 하며 그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해, 과거의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 해체쇼를 하듯 모조리 꺼내서 한바탕 얘기하고 보니 '그래, 헤어지는 게 맞아!' 마음이 굳어졌다. 머릿속은 명쾌해졌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리고 동생이 전화를 끊으며 한 말은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언니, 증명해야 한다는 말 하지 마. 뭘 하든 안 하든 언니는 존재 자체로 그냥 소중한 사람이야. 언니의 능력과 언니의 일로 언니를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와 만나고 이틀 뒤, 별말이 없던 그는 갑자기 황당한 카톡을 보냈다.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나에게 준 돈의 액수를 얘기하며 말했다.
"더 조정할 게 있는지 확인해 보고 의견 없다면 원만한 협의를 위해 공증사무소에서 공증받아 놓을 예정이야. 원하지 않으면 조정 혹은 소송으로 가면 되니까 의견 있으면 얘기해 줘."
우리의 돈은 내가 주식계좌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그에게 얼마를 돌려주면 될지 계산해서 알려달라고 한 상태였다. 당장 주고 싶어도 지수가 크게 하락했을 때라 지금 돈을 빼면 손해가 막심하니 어느 정도 회복되면 돌려주겠다고 한 거다. 그런데 갑자기 공증이니 소송 얘기를 꺼내는 게 황당하면서도 괘씸했다.
크리스마스에 그의 난동으로 경찰이 출동한 기록, 그의 폭언이 담긴 녹음파일이 있으니 위자료를 요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난 소송을 걸 생각도 위자료를 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혼해서도 그가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재밌는 파도를 타듯 세상을 사는 나와 달리, 파도에 다치진 않을까 자주 불안해하던 남편이었다. 내 미래는 걱정이 안 됐으나 이혼이 쓰나미가 되어 그의 인생을 집어삼키진 않을지 그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남이라는 듯한 그의 카톡은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바보처럼 느끼게 했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며칠 뒤인 오늘 또 카톡이 왔다.
저녁 10시쯤 시작한 통화는 약 5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우린 모처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가 공증 얘기를 한 것에 대해 설명했다. 자기도 너무 헷갈리고 마음이 힘들어서 이렇게라도 선을 그어야 좀 괜찮아질 거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내가 대답이 없으니 자꾸 신경이 쓰여서 전화한 거 같았다. 진솔하게 얘기를 나눠보니 그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감정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우리 의식의 흐름은 놀랄 만큼 닮아있던 거다.
5시간 대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그가 너무 빡빡해서 싫다는 여자와 그녀가 너무 뻔뻔해서 싫다는 남자.
그가 너무 부정적이라 김빠진다는 여자와 그녀가 너무 낙천적이라 대책 없다는 남자.
그가 너무 화를 잘 내서 화 풀어주다 인생 끝날 거 같다는 여자와 자기를 너무 화나게 해서 못 살겠다는 남자.
둘 다 이혼 결정에 대해 마음이 약해지고 많이 흔들리고 있지만 우린 이미 애증이 아닌 서로를 증오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로에게 느끼는 견딜 수 없는 싫은 점이 극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다시 노력해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내가 형부나 KB와 대화한 것을 언급하며 그의 마음을 읽어주고,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의 노고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희망을 보는 듯했다. 내가 ‘우린 아닌 거 같다’라며 전화를 끊었는데도 다시 전화해서 오해를 풀려고도 애썼다. 내가 너무 미운데 계속 눈에 밟힌다며 웃어 버리던 그는 아직도 나를 많이 사랑하는 거 같았다. 그를 사랑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사랑하는 것과 같이 잘 살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다시 합쳐야 하는 이유가 되진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언니한테 전화가 왔고, 자연스럽게 어제 그와 통화한 얘기가 나왔다.
"너는 ㅇㅇ이가 없어도 돼. 문제는 그거야.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꼭 필요해야 하는데 너흰 아니야. 특히 너에게 걔가 필요하지 않아. 서로가 필요한 게 다르고, 줄 수 있는 게 다른데 왜 정 때문에 서로를 힘들게 하면서까지 함께하려 해?"
언니는 이참에 그냥 헤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며 그와 살면 내 인생은 지극히 평범해질 거라 했다. 평범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언니 입장에선 그와 그렇게 맞추며 사느라 나의 재능이 꽃피우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편을 들며 말했다.
"네가 걔를 감싸준다는 마인드는 썩었어. 진짜 오만한 거야. 네가 생각할 때나 못났지, 귀한 아들이야. 그렇게 게 욕할 거면 놔주는 게 맞아."
"그렇게 헷갈리면 생각해 봐. 돌아가면 다시 결혼할 건지. 지금 마음을 돌리는 건 다시 결혼하겠다는 거랑 똑같은 거야."
언니는 그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거 아니면 절대 다시 합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이참에 상황을 바꾸든지, 돌아갈 거면 불평을 말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속 혼란이 완전히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가 못난 게 아니라 내가 오만한 거면 어쩌지? 그의 말이 다 맞는데 나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한 거면 어쩌지? 나중에야 깨닫고 뼈저리게 후회하면 어쩌지?'
마음속을 떠도는 불길한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 채, 법원에 가기로 한 날은 어느새 성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