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의 첫 이혼부부가 되었다

by 온호류



2024년 3월 24일 일요일

대전에서의 재회 (남이 되기까지 D-38)



시간은 잘도 흘러 이혼 서류를 접수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우리의 이혼에 대해 머리로는 '잘했다, 이게 맞다.' 논리적으로 납득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편에는 여전히 '잘한 결정일까? 후회하면 어쩌지?' 망설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법원은 화요일에 갈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이혼 결정에 인사도 못한 지인들을 보기 위해 조금 일찍 대전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인천 사는 친한 언니 집에 들러서 그간 못한 이야기와 함께 이혼 소식을 전했다. 언니도 나의 결정을 지지하는 동시에 많이 안타까워했다. 그와 함께 언니 집에 놀러 와 언니 남편분과 넷이서 즐겁게 웃었던 기억들이 떠올랐을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언니의 남편은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남편이다. 자상하고 센스 있고 일도 잘하시고 유머러스한데 요리까지 수준급인 만능 사랑꾼이랄까. 언니도 늘 결혼 정말 잘했다고 얘기하곤 했다. 둘은 내가 생각하는 워너비 부부다. 언니는 결혼 9년 차임에도 거의 싸운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근데 최근 아이를 낳고 나서 몇 번 크게 싸웠다는 거다. 속으로 '언니 부부도 싸우긴 하는구나!' 생각했다. 오빠랑 싸운 얘기, 서운함과 불만 등을 토로하며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냥 넘어갔지."


순간, 언니 얘기를 듣고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던 거 같아서.


때로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삼키고 참았어야 하는 것들을 참지 못해서 우리가 계속 싸우게 된 건가? 마음에 안 드는 (전)남편의 어떤 부분을 계속 고치려 했기 때문인 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런대로 일단 넘어가고 보면 괜찮아지기도 하고 스스로 바뀌는 순간이 왔을 수도 있는데, 굳이 짚고 넘어가면서 그의 자존심을 긁어버린 내 탓이려나?



IMG_4075.jpg 언니 남편분이 차려준 저녁



"잘 고민해 보고, 널 위한 선택을 해."


언니 남편분이 차려준 저녁을 먹고 나서 언니의 따뜻한 응원을 뒤로한 채 대전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아까 든 생각들로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잠잠해질 생각이 없는 스스로를 향한 자책으로 혼란한 가운데 그와 마주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태도 덕분에 나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완전히 냉대했다. 내가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 않고 핸드폰을 하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유치했다. 물론 전화를 끊을 땐 '우린 헤어지는 게 맞다'며 결론 내리고 끊었으나, 불과 4일 전에 그리도 애틋하게 통화했으면서 왜 또 저러는 건가 싶었다.


'아, 맞다! 나 이런 변덕에 지쳐서 그만하기로 한 거지. 이런 유치한 언행을 따뜻하게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떠나기로 한 거지.'


잊고 있던 결혼생활의 번뇌가 떠오르면서 이혼의 당위성이 다시금 분명해졌다.

이날 밤은 어떠한 미련도 없이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오랜만에 또 다퉜다. 남편이 아침부터 혼자 변호사 사무실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어젯밤, 그의 냉랭한 태도를 보고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에게 공증을 서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나에게 준 돈에 대한 공증을 서주길 원했고, 나는 그러기로 했었다. 2022년부터 주가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원금이 반의반 토막이 난 상태였지만 그가 나를 믿고 돈을 맡겼던 만큼 그의 원금은 돌려주겠다고 했던 거다. 하지만 어제 그의 태도를 보며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벌써 말도 섞기 싫은 남처럼 대하는데 연민은 가져봤자 뭐 하나, 그간 내가 그를 위해 해온 희생과 노력, 우리가 쌓아온 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 환멸을 느낀 거다.


돈을 못 받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는지 그는 아침 일찍 변호사에게 다녀왔다. 예전에 관련 사항을 검색해 본 바로는, 부부가 서로 동의하에 투자를 진행한 거면 손실에 대해 원금을 돌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리고 표면적인 이혼의 귀책 사유는 그에게 있고, 녹음파일이나 경찰 출동 이력 등 그에게 불리한 증거만 있기 때문에 오히려 법적 싸움으로 가면 그는 나에게 위자료를 줘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걸 다 알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원금도 돌려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는 걸 보니 남아있던 정마저 떨어지는 듯했다. 따로 지낼 땐 내가 부족한 것, 잘못한 것, 미안한 것, 그가 나에게 잘해준 것들만 생각났는데 고작 하룻밤 붙어있는 걸로도 내가 왜 이혼을 결심했는지 상기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는 소송으로 가봤자 이득 볼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내 뜻에 따라 구두로 합의했다. 그리곤 자기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점심으로 파스타를 해줬다.


점심을 먹고,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먼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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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태의 대전 친구들 - 좌시월, 우메이 / 윅스커피 마스코트 콩이와 메이



대전에서 지내는 3년간 좋은 이웃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 부부를 아들딸처럼 챙겨주시던 지음카페 사장님, 경태와 함께 산책하던 강아지 친구들의 견주분들, 나와 경태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윅스커피와 사장님 커플이 그랬다. 남편과 싸우고 혼란스러울 때 이렇게 혼자 글을 쓰며 마음을 정돈하던 동네 카페들이 있었기에 마음을 재정비하고 다시 그와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김포에서 식당을 하신다는 웰시코기 메이의 견주분은 종종 엄마가 보내주셨다며 주꾸미와 닭발을 나눠주셨고, 가끔 남편의 회식으로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때면 자기 집에서 같이 먹자며 나를 초대해 주었다. 주변에 강아지 출입이 안 되는 카페가 많았으나 카페 사장님들은 누구보다 경태를 반겨주셨고, 나의 간식과 더불어 경태의 간식까지 살뜰히 챙겨주셨다. 이런 다정한 마음들이 있었기에 연고 없는 대전에서 외롭지 않게, 명랑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족처럼 지냈던 건 지음카페 사장님이었다. 따뜻한 사장님 인심에 반해 단골 카페가 되었고, 사장님의 소개로 나보다 10살 어린 사장님의 딸과도 친해졌다. 그렇게 점점 더 가까워져 급기야 사장님네 가족과 우리 부부는 가족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을 만큼 친한 사이가 됐다.


그런 사장님에게 이혼 소식을 전하는 것은 엄마 아빠에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죄송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를 누구보다 사랑해 주셨던 사장님이라서 마치 공들여 함께 쌓아온 도미노를 내 멋대로 부숴버리는 느낌이었다. 사장님의 소중한 추억을 내 멋대로 아프게 도려내는 느낌. 앞으로 우리 부부를 다신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게 다가올지 그 속상함이 헤아려졌다.


카페로 들어가니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나와 경태를 맞아주셨다. 안부를 물으며 근황 얘기를 하다가 내일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법원에 간다고 하니 사장님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전화로 먼저 이혼 얘기를 전했을 때처럼 사장님은 자긴 괜찮으니 내 생각만 하라며 거듭 안아주셨다. 나중엔 결국 울음을 터트리셨지만 사장님이 잘했다고, 괜찮다고 해주시니까 그제야 비로소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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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이혼 서류 접수 (남이 되기까지 D-36)



아침 8시 58분, 대전가정법원에 도착한 우리는 이날의 첫 이혼부부가 됐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5년이나 걸렸지만, 우리의 이혼 서류는 5분 만에 처리가 됐다. 이혼 결정을 내리는데 걸린 5초의 시간만큼이나 허무하게 느껴지는 5분이었다. 이혼을 결정하기까지 그 과정이 힘든 거지 이혼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주민등록증을 대조하고, 도장을 찍고, 한 달 뒤 법원 출석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들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재밌었고 행복했지만, 때론 절망적이고 지긋지긋했던 우리의 결혼생활.

안다. 이런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면서 더 단단해지고 애틋한 사이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한 30년 뒤쯤 우리가 60대가 되면 보기 좋은 노부부처럼 손잡고 산책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알기 때문에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에도, 이건 아닌 거 같다고 느껴지는 때에도 헤어지지 못하고 질질 끌었다. 5년간 미워하는 마음만큼 정도 많이 들었기에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견디면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라는 희망으로 버텼다. 찐득하게 달라붙은 그놈에 정 때문에.


하지만 이젠 서로를 보내주는 게 맞는 거 같다. 혹은 도망치는 게 맞다. 미래의 내가 후회하더라도 말이다. 현재의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하는데 더 이상 두고 보는 건 방관이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정답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내가 그 문제를 풀어낼 능력이 안 된다면 문제를 놓아주는 것도 하나의 지혜이다.

5년간 풀리지 않는 문제를 잡고 씨름했다면 그 문제를 틀리더라도 다른 문제를 푸는 게 맞다. 나중에 문제를 끝까지 풀지 않고 포기한 걸 후회하나, 그 문제를 푸느라 다른 문제를 못 푼 걸 후회하나 매한가지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남편은 나를 집에 내려주고 바로 출근했고 나는 차에 실어 갈 짐을 싸며 서울 갈 채비를 했다. 낑낑거리며 짐을 다 옮겨 싣고 나서 현관을 나서기 전 문득 식탁 위에 두었던 오르골이 보였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그와 함께 놀러 갔던 제주도에서 사 온 거였다. 오르골을 돌리니 '제주도의 푸른 밤'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가사 없이 딩딩 울리는 오르골 소리가 참으로 구슬프게 들렸다.

감정이 격해지면 이 오르골을 돌려서 서로의 소중함을 일깨우자고 오르골을 식탁 위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싸우면서 이 오르골을 생각해 내고 돌린 적은 없었다. 오르골을 돌리며 '나도 똑같았구나' 생각이 드니 문득 그에게 미안해졌다. 편지라도 짧게 남기고 싶어져 급히 편지를 써서 오르골과 함께 식탁 위에 두고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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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자기를 안 돌리고 계속 싸우는 걸 보며 이 오르골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차에 짐을 가득 싣고 경태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아직도 애잔한 오르골의 멜로디가 마음속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저녁에 편지를 확인한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잘 도착했니?
올라가는 길에도 나를, 서로를 응원해 줘서 고마워.
미안한 마음이 많아. 항상 행복하길 바라. 꿈 많은 친구야.



'꿈 많은 친구야.' 이 말이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는지. 하고 싶은 거 많고 꿈 많은 나 때문에 그가 겪었을 수많은 불안과 불편함을 담담히 묻어주려는 거 같아서, 이 짧은 문장에 그간 내뱉지 못하고 눌러뒀던 많은 말들이 담겨있는 거 같아서, 나는 카톡을 바라보며 한 참을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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