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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지 못하는 남편, 떠나가지 못하는 아내

by 온호류



"여보세요?"

"방금 이혼하기로 했다고 전화받았는데 무슨 일이야!? 너가 잘못했지!"


엄마는 대뜸 내 잘못이냐고 묻는다. 웃기면서도 좀 서러웠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멀쩡히 다니던 대학원도 때려치우고, 지금 돈도 안 벌고, 요즘 주식도 안 좋잖아. 애가 화날만하지!"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예전부터 성격 문제로 많이 싸웠어. 쟤가 엄마 아빠 앞에서 잘해서 그렇지, 나랑 싸울 때마다 ㅆㅂ년아 막 이랬다고. 밀쳐서 멍든 적도 있고. 지난 크리스마스 땐 병이랑 와인잔 다 깨서 경찰도 왔었어. 이런 거 아무것도 모르잖아."

"뭐? 왜? 언제부터?"

"대학원 아파트 살 때부터 그랬어. 내가 대학원 그만두기 전부터, 주식으로 돈 잘 벌 때도 그랬다고!"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뭐해 걱정만 하지. 그리고 점차 나아질 줄 알았지 더 심해질 줄 알았나. 12월부터 부부상담받고 있는데 달라질 거 같지 않아서 그냥 이혼하려고. 나 아직 대화중이야. 나중에 다시 통화해. 끊어."


머리가 다시 지끈 아파왔다. 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전)남편의 유치한 언행과 네 잘못이네 내 잘못이네 하는 도돌이표 같은 말싸움. 정말 다 그만하고 싶었다.


더 이상 내 인생이 나의 통제권을 벗어나 남편의 행동, 의지, 결정에 의해 휘둘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저녁에 집에서 이혼 얘기를 마무리 짓기로 하고 대화를 종료했다. 나는 경태와 카페에 갔다.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또다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굳혀야 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


아이패드를 켜고 이혼해야 하는 이유를 담담히 적어 내려갔다.


왜 나는 이혼하려 하는가?

1. 이혼을 하냐 마냐 고민하고 휘둘리느라 인생이 흔들리고 방향성이 흔들리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 너무 자주 싸워서 싸우는데 많은 에너지를 뺏긴다. 그 시간을 아꼈으면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거야.

3. 화나면 폭언하는 것, 제멋대로 해버리는 돌발행동. 너무 부끄럽고 더는 참을 수 없다.

4. 기분 상하면 유치하고 치졸해지는 게 싫다. 대화가 안 통한다. 언제까지 나만 보듬고 눈치 보며 살아야 하나.

5. 덤벙거리는 성격이나 낙천적인 것 등 고칠 수 없는 나의 천성에 불만을 품고 비난하는 게 싫다.

6. 내로남불 지긋지긋해. 자기도 못하면서 나한테 바라고, 자기는 화내면서 내가 화내면 뭐라 하고.

7. 앞으로 살날이 40~50년 정도 남았으니 함께한 3년이 아깝다고 나머지 40~50년을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

8.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더니 2개월 지나니 똑같아졌다. 이미 신뢰가 깨져서 다시 신뢰를 쌓는 게 힘들 듯.


적어보니 지나온 세월이 원통하다. 헤어질 이유가 충분했다. 이제 흔들리지 않을 거 같았다.

혹시나 해서 늘어난 모짜렐라 치즈 가닥처럼 붙어있는 미련의 목소리도 적어보았다.


왜 다시 노력해 보고자 하는가?

1. 아직은 희망이 있는 단계이다. '부부 상담'이라는 안 해본 시도가 있기 때문에. (아직 7번밖에 안 했으니까)

2.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이 남으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노력해 볼 여지가 있다는 뜻일 수도.

3.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건 정말 힘든 일인데 남편은 적어도 1월 이후로 욕과 폭언은 안 하고 있다. 그 힘든 걸 해낸 남편이니까 좀 더 기회를 주는 게 맞지 않을까?

4. 남편이 나한테 잘해주고 헌신한 것도 사실이다. 그 노고에 대한 의리를 지킬 필요도 있는 거 아닐까?

5. 이혼 관련된 TV프로그램을 보면 다들 저마다의 사정으로 힘들고, 힘들어도 이겨내고, 잘 살아보려 부단히 노력하는 거 보면 원래 부부가 이런 건가? 이런 시련을 이겨내며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건가?

6. 나중에 '그때 그냥 빨리 헤어질걸' 후회하더라도 '한 번 더 노력해 볼걸'이란 후회보단 나을 거 같다.


적어보니 이 또한 납득이 간다. 왜 흔들렸는지 알 거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증거가 더 쌓였어도 역시나 쉽지 않은 고민이었다.


하지만 고심 끝에 기회를 줘보기로, 다시 노력해 보기로 한 거였는데 달라지겠다던 남편은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람은 고쳐쓰는거 아니라더니, 남편도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게 내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두 가지 선택지 중 계속 '헤어지지 않는다'를 선택해 왔었는데 내 삶이 더 나아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헤어진다'를 선택해 볼 차례였다.


출처 : 유튜브 <TVING>


퇴근한 남편과 집에서 얘기를 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나는 모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나쁘게 말하면 차게 식었다. 남편에 대한 분노도 짜증도 없었다. 그냥 이 사람이 나 없이 잘 지냈으면 했다. 그가 바라던, 나와는 다른 여자를 만나 잘 살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잘 사는 모습을 상상할 때 질투가 나지도, 싫지도 않았던 거 보면 이미 예전부터 사랑의 감정이 아닌 정이자 연민이자 전우애 같은 거 아니었을까 싶다.


감정이 사라지니 우리는 대화가 참 잘 통했다. 딱히 억울하거나 얄미운 감정 없이 남편이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고 인정해 줬다. 이제 끝내는 마당에 못해줄게 뭐 있겠나? 그랬더니 어제 전화로 싸울 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설전이 오고 간 주제인데도 어이없게 금방 풀려버렸다.


화가 풀리고 오해가 풀린 남편은 마지막으로 같이 맥주나 한잔하자고 했고 우린 새벽까지 맥주를 마시며 그간 못했던 솔직한 얘기, 직설적인 비난 등을 웃으며 주고받았다. 이 순간만큼은 지극히 자유롭고 개방적 사고를 가진 미국인 부부 같았다.


우리의 마지막 술자리가 끝나갈 때 즈음 남편은 말했다.


"미안해. 내가 진짜 정신 차리고 잘해볼게, 우리 이렇게 끝낼 사이 아니잖아. 다시 잘해보자."


화도 풀렸겠다. 술기운에 감성도 올라왔겠다. 남편은 이전처럼 자신의 말을 번복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나 이미 마음 정리 다 했고, 나 이제 너 못 믿어. 넌 앞으로도 똑같을 거야."


남편은 내 생각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침대에서,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순간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던 건지도 모른다.

로젠탈&제이콥슨이 '피그말리온 효과'를 증명해 낸 실험처럼 기대는 성과를 만든다. 누군가의 지지와 응원은 실제로 사람의 행동과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효과는 배가된다.


반대 개념인 '골렘 효과'도 마찬가지다. 낮은 기대는 성과 저하로 이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의심과 무시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있던 잠재력까지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나는 남편을 믿지 못했고, 변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어쩌면 나의 장담이 남편을 그렇게 이끌어 간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내가 진심으로 남편을 신뢰하면서 우리의 관계가 좋아질 것을 확신했다면 정말 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경태는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았을까?



만약 친한 친구가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왜 그런 취급받으며 사냐고, 이혼해 버리라고 노발대발했을 거다. 하지만 이혼은 한순간의 결심이 아닌 우리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아 가는 지리멸렬한 여정이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바로 헤어질 수도 없거니와 아무리 이혼이 쉬워졌다고 한들 경험상 전혀 쉽지 않았다.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약해진 만큼 이혼 결정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사회적 시선이 아닌 '매몰비용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이는 손해를 확정 짓기 싫어서 더 큰 손해를 감수하며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 심리로 주식 투자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가지고 있는 주식의 전망이 안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지금이라도 팔아야(손절해야) 하지만 잃은 돈이 아까워 팔지 못하거나 오히려 주식을 계속 사들이며 '언젠가 오를 거야'라는 마음으로 버티는 흔한 개인투자자의 잘못된 의사결정이 대표적이다.


이혼도 마찬가지다. 이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태껏 지내온 시간과 추억 등이 아깝기도 하고 나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쉽지 않으니 힘겨운 결혼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관계가 좋아질 거라는 혹은 배우자가 언젠가는 변해서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실낱같고 위태로운 희망에 인생을 걸고 버티게 되는 거다.


손절은 어렵다. 버티는 것도 쉬운 건 아니나 손절보단 쉽다. 아니라는 결심이 섰다면 이미 지나온 시간과 추억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를 봐야 한다. 무작정 버티면 주가는 더욱 내려갈 뿐이다.


오래 고민하며 시간을 끌고 계신 분이 있다면, 빠른 손절은 더 나은 투자기회를 잡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이미 칼같이 이혼을 하신 분이라면 본인이 주식투자에 소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 (손절을 잘해야 주식을 잘한다고 함.)


※ 본 콘텐츠는 투자 권유 목적이 아니며, 투자 판단은 본인의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



내가 우리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 내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매몰비용의 오류를 범한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편에게 남아있는 연민 때문이었을까? 혹은 정말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던 걸까?


당시에도 확신은 없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지나고 보니 결국 매몰비용의 오류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한 번 더 잘해보기로 합의했고 3주 뒤에 함께 여덟 번째 상담을 하러 센터로 향했다.


그리고 이때의 잘못된 결정으로 2년이란 시간을 남편이란 주식에 더 물려 있어야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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