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상담에서 오해를 풀고 화해하긴 했지만 마음 한켠에서 일렁이던 불안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 관계, 회복할 수 있긴 한 걸까?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거 같은데…. 괜히 시간낭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며칠 뒤, 불안은 현실이 되었고 오지 않길 바라던 그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그날은 내가 저녁으로 라볶이를 했다.
상담을 하면서 남편이 일하고 와서 요리도 하는 것에 불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작 같이 하자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요리 싫어하는 걸 아니까 말 못 했나 보다. 이런 불만이 쌓였다가 사소한 일로 터져 나오는 거구나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도 요리를 해보기로 했다. 할 줄 아는 건 몇 없었지만 이러한 노력이라도 필요하다면 해야 했다.
면이 불까 봐 남편이 도착한 뒤 라면사리를 넣었고 조리 후 식탁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안방에서 전화를 받더니 나오질 않는 거다.
"면 다 불어~ 빨리 와~~!"
남편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통화를 계속했다. 종종 수다를 떨곤 하던 회사 선배인듯했다. 먹으면서 통화해도 되고 밥 먹는다고 끊으면 될 텐데 뭐 하나 싶었다. 면이 벌써 불고 있었다.
안방 문을 열고 전화기 너머까지 들리도록 크게 얘기했다.
"안 나오고 뭐해? 면 다 분다니까!"
남편이 입모양으로 알았으니까 나가란다.
모처럼 요리를 한 건데, 맛있을 때 먹었으면 좋겠는데, 아무 설명도 없이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음식은 다 불고 있으니 살짝 짜증이 났다.
순간 예전에 있던 일들이 흑백영화처럼 휘리릭 스쳐 지나갔다.
남편이 요리를 할 때 보통 나는 실험실에 있었다. 밥 먹기로 한 시간까지 실험을 끝내고 집으로 가야 했는데 하다 보면 자꾸 지연돼서 미안하다며 늦게 간 적이 많았다. 남편은 그걸 정말 싫어했다.
시간 약속 안 지키는 걸 워낙 싫어하기도 했고 기껏 요리해 놨는데 안 오면 짜증 나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됐다. 그래서 미안하다며 싹싹 빌었다. 하지만 너무하다 싶을 만큼 화를 낸 적이 많아서 잊혀지지 않는 속상한 기억이 많다.
한 번은 실수를 수습하느라 40분이나 늦게 왔는데, 남편 먼저 먹고 치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너 줄 거 없어"라며 내 몫으로 차려뒀던 된장국에 수돗물을 부어버렸다.
"내가 니 식모야?" 라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너무 미안했지만 한편으론 억울하고 서글펐다. 내가 부탁한 게 아닌 남편이 스스로 하겠다며 시작한 요리였다. 일부러 늦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자기를 우습게 여긴다며 화를 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 순간 그때 내게 화를 내던 남편의 입장이 되어 본 거였다.
확실히 짜증이 나긴 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었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니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엔 '내가 잘못했으니까….' 하며 나의 상처를 돌보기보단 남편의 화를 풀어주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급급했다. 그런데 그 입장이 되어보니 느껴졌다.
'뭐야, 충분히 참을 수 있는 거였잖아?'
내 잘못이라며 남편의 언행을 합리화했었는데, 그가 그저 화를 참지 않았을 뿐이었다. 상대를 우습게 여긴 건 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는 걸 순간 깨달았다. 그에게 나는 이 정도 짜증조차 참지 않고 내질러도 되는 그런 존재였던 거다.
이런 생각에 더해 문득 자기도 일 생기면 바로 못 오면서 실험 때문에 늦는 나한테 그렇게 화를 냈나? 생각하니 미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남편은 몇 분 뒤 전화를 끊고 선배가 계속 얘기해서 끊을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 하곤 라볶이를 먹었다.
"다 불었잖아. 모처럼 내가 요리했는데, 밥 먹어야 한다고 끊음 되지 뭐 그렇게 계속 통화를 해? 너는 내가 조금만 늦게 와도 엄청 뭐라 그러면서 너가 그렇게 싫어하던 행동을 너는 왜 하는데?"
다소 짜증 섞인 투로 얘기했다. 오늘 남편의 행동에 대한 짜증보단 그의 내로남불에 대한 짜증이었다.
남편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미안한 태도가 아니었다.'뭐 이런 거 가지고 짜증을 내?'라는 태도였다.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한 행동은 다 잊어버린 거 같았다. 내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아픈 기억이 한 보따리인데 말이다.
나름 노력해 보겠다고 해본 요리인데 남편은 고생했다거나 맛있다거나 그런 격려의 말 한마디 없이 먹기만 했다. 나의 말과 태도에 기분이 안 좋아진 듯했다. 과거 얘기를 들먹거리는 것도 듣기 싫은 거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가뜩이나 짜증 났던 기분은 더 나빠졌다.
우린 아무 말도 없이 불어 터진 라볶이를 먹었다.
대충 식사를 하고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닫혀버린 안방 문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저 닫힌 문이 거듭 미웠다. 거실에는 위로받지 못한 나의 속상함과 인정받지 못한 라볶이만 남았다.
'너가 짜증 내면 내가 잘못해서이고, 내가 짜증 내면 별것도 아닌 걸로 짜증 내는 건가?'
'너가 화나면 내가 풀어줘야 되고, 내가 화나면 알아서 풀어야 하는 건가?
속에 쌓인 말들이 터져 나올 거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각자 할 일을 하며 저녁시간을 보내고 여느 때처럼 남편은 일찍, 난 늦게 잠이 들었다.
우리에겐 재밌는 룰이 하나 있었는데, 5시에 카톡으로 먼저 'ㅁㅁ?(뭐 먹어? 의 줄임말)'을 외치면 'ㅁㅁ?'을 외치지 못한 사람이 저녁 메뉴를 정하는 거였다.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게 힘에 부쳤던 남편이 고안한 깜찍한 해결책이었다.
전날 일로 기분이 별로였지만 같이 노력하기로 했으니 밥 먹으면서 얘기하고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5시에 내가 'ㅁㅁ?'을 외쳤다. 평소 같으면 아깝다며 바로 저녁 메뉴를 말했을 텐데 남편은 계속 대답이 없었다. 퇴근 시간쯤 전화를 하니 그는 성질을 냈다.
"카톡 못 봤어? 뭐먹?"
"내가 너랑 뭘 먹어? 니가 그딴 태도로 나오는데."
"……."
어김없이 우린 또 다퉜다. 역시나 남편은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였다. 그리고 달라지겠다고 했던 그이지만 여전히 내가 풀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마음을 풀 생각이 없는 듯했다.
평소 내가 늦으면 늦게 온 내 잘못이기 때문에 남편이 화내는 건 당연했다. 내가 남편을 화나게 한 거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이 나를 화나게 했는데 왜 이번에도 남편이 화가 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으론 '사정이 있으면 늦을 수도 있는 거니까 앞으로 서로 늦는다고 짜증 내지 말기로 하자'라고 예쁘게 말했으면 좋았을 거 같다. 그랬다면 남편 기분도 안 상했을 거다. 하지만 내 안에 울분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 이혼하기로 결정했던 거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남편에게 당했던 게 떠오르면서 나도 화가 났다.
지금까지 그냥 다 내가 잘못했다고,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사과해 왔던 것들이, 그 억울함이 터져 나오고 있는 참이라 예쁜 말은 고사하고 욕이라도 안 하면 다행이었다.
전화를 끊자 머리가 지끈 했다.
경태를 데리고 동네 단골 카페에 갔다. 밥맛도 없고 남편과 마주치기 싫어서 마감시간까지 있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다.
저녁을 안 먹었다는 말에 사장님이 맛있는 걸 잔뜩 내어주셨고 경태의 잔망을 보며 함께 웃었다. 다정한 사장님과 귀여운 경태 덕분에 두통이 사라지고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생각해 보면 매주 반복되는 남편과의 불화를 견뎌낼 수 있던 건 이런 일상의 따스함 덕분이지 않나 싶다. 대전에서 만난 온정 넘치는 이웃들과 말없이 나를 위로하던 경태. 남편에게 받은 상처를 이 소중한 인연으로부터 치유받았기 때문에 이후로 3년을 더 버틸 수 있던 거 아닐까?
다음날 오전, 남편이 먼저 카톡을 했다.
- 아무리 화나도 밥은 먹였어야 했는데 좀 과했다 미안하다. 너가 사과 안 하니까 너무 화나서 그랬어.
왜 내 사과를 바라는 걸까. 남편의 행동에 기분이 안 좋아진 건 나인데 남편은 기분이 안 좋은 나를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라볶이에 물을 부은 것도 아닌데, 나보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게 조금 황당했다.
결혼 후 약 2년간 남편은 먼저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었다.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나를 밀쳐도 사과하지 않았다. 자기를 화나게 한 내 잘못이니까 내가 사과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왜 맨날 나만 사과해야 하냐고 속상함을 토로하니 다음엔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기다린 적이 있다. 2주 가까이 말을 안 하고 지내는 게 답답해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더니 남편은 사과가 아닌 이혼 얘기를 꺼냈었다.
1월에 이혼하겠다는 나를 설득할 때, 남편은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너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할 기회를 줘."
나는 이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당시에는 분명 진심이었을 거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카톡으로 마음에 있던 얘기를 쏟아냈고, 남편도 자기 얘기를 했다.
- 남편: 니가 승질내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대체
- 나: 나는 여태껏 영문모를 니 승질을 어르고 달래서 다 풀어줬는데, 너는 왜 못해?
너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잖아. 나는 여태껏 노력하다 지친 상태라고. 내가 노력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까 이제 너가 좀 끌고 가면 안 돼?
- 남편: 난 노력하고 있어 충분히. 니가 안 따라와 주는 거고. 내 탓만 하지 마. 내가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 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니라 내 기분이 왜 안 좋은지 물어봤어야지. 풀어줬어야지.
- 남편: 니가 끊은 대화잖아.
- 나: 계속했어야지. 내가 쌍욕을 했어 폭력을 썼어? 그냥 말 안 하고 있던 건데. 그거도 못하겠다고 들어가 버리는 게 최선의 노력이야?
나는 쌍욕을 먹어가면서도 너랑 얘기하고 풀려고 그렇게 노력했어. 솔직히 내가 한 거에 비하면 너가 노력을 안 하는 것처럼 보여.
3년간 내가 했던 노력의 반의반만이라도 나를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노력을 보였으면 했다. 본인의 감정보다 내 감정을 먼저 헤아려주는 노력을 했으면 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좀 풀릴 거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 또한 더 이상 그의 사고방식에 나를 맞추며 마음속 억울함을 쌓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의 감정이 아닌 내 감정을 먼저 보듬어주고 싶었다.
- 남편: 뭘로 어떻게 풀어줘 내가 하인처럼 엎드리냐? 난 그렇게 안 살아
- 나: 그래 그럼 이혼하자. 화 풀어주는 것도 자존심 상해서 싫다니 말 다했네.
3월 18일. 상담실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운지 두 달 반 만에 나는 또 한 번 마음을 정리했고, 우린 이혼하기로 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이 큰 다툼이 되고, 별거 아닌 일에 화내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지긋지긋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잘하겠다던 남편의 태도는 3개월을 못 채우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더 이상 남편의 화를 풀어주느라, 이해 안 되는 그의 언행을 이해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당장 엄마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난 싫다고 했다. 못하겠다고. 나중에 하겠다고.
그랬더니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했다.
'저번에 어머니한테 전화하라고 한 게 억울했나? 유치한 놈….'
남편과 통화를 했는지 엄마한테 바로 전화가 왔다.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