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유, 계란 알레르기 보유인의 디저트
오븐이 돌아가는 주말 오후, 집에는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득하다. 놀러온 친구들은 자꾸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오븐을 힐끗거린다. 땡. 드디어 내가 가장 자신있게 만드는 디저트, 애플파이가 완성되었다.
알레르기가 생기기 전만해도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베이커였다.
원데이 클래스에서 만난 베이킹에 취미를 붙인 지도 어느덧 몇 해가 지났다.
작은 중고 오븐으로 여러가지 레시피를 변형해가며 스콘부터 머핀, 치아바타, 레몬치즈케이크, 각종 쿠키와 파이를 섭렵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베이킹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러 명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새로운 맛의 디저트를 맛보며 레시피를 추측해보고, 집에서 따라 만들어냈을 때의 짜릿함이란!
우유와 계란 흰자 알레르기를 진단 받았을 때, 내 유일한 취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가장 절망스러웠다.
머랭을 쉽게 쳐내려고 핸드믹서를 산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삶에서 우유와 계란을 제거하면 도대체 어떻게 디저트를 만들고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알레르기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골골 거리던 시기라,
주말에도 집에 콕 박혀 요양을 하던 어느 토요일,
나를 가엾이 여긴 친구가 집에 조각케이크를 들고 방문했다.
“고오, 이건 너도 먹을 수 있는 케이크래.”
“뭐?”
비건 디저트와의 첫만남이었다.
그날 만난 비건 블루베리 쌀케이크에 나는 녹아내렸다.
부드러운 크림에 달큰한 블루베리 콩포트, 폭신한 케이크 시트를 마음 놓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날의 홍차와 케이크의 페어링은 아직도 혀에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알레르기 음식 목록에 육류는 없었기 때문에 비건이라는 키워드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비건 디저트 시장은 커져 가던 참이었다.
알레르기 뿐만 아니라 암이나 갑상선 질환 등 치명성은 줄어들었지만 발생 빈도가 흔해진 질병들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비건 식단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넘어 지구 열대화 시대에 접어들며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어느새 서울 시내 곳곳에 비건 카페, 비건 디저트 가게가 하나씩 늘어났다.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비건 카페들을 소개하는 글을 블로그에 쓰면서부터였다.
나처럼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겨 당황한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아직은 마이너한 그룹을 대상으로 하는 비건 디저트를 선보이는 업장들이 건재하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더불어, 비건이 새롭게 각광받는 키워드인만큼, 비건과 글루텐프리를 혼동하여 잘못 소개된 곳들도 많아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고 싶기도 했다.
내 취미생활도 활기를 되찾았다.
주말시간을 쪼개 비건베이킹 자격증 수업을 듣고, 실습을 해보면서 다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나갔다.
열심히 만든 결과물들을 직장 동료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이거 계란이랑 우유 안 들어간 거에요.” 라고 비건디저트의 맛과 건강함을 뽐(?)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느덧 마음에 드리웠던 그늘도 걷힌 것 같다.
알레르기 때문에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먹어라며 억울해하던 나는,
알레르기 덕분에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음식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었다.
블로그에 도움이 되었다는 댓글이 달리면 마음 속 깊이 뿌듯해지기도 했다.
만들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비건 디저트들의 가짓수를 늘려가면서 인생 만족도가 쑥쑥 올라갔다.
우연한 실수가 멋진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치명적인 약점이 독특한 강점이 될 수 있다.
음식 알레르기가 생겼다면, 새로운 식재료를 경험해보는 계기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유 대신 맛있는 두유를 찾아나서 보거나, 밀가루 빵 대신 맛있는 쌀가루 케이크를 맛보는 것을 추천한다.
음식 알레르기가 일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나만의 특별함으로 여겨질 수 있다. 경험해보니 진짜 그렇다.
맛있는 서울의 비건 디저트 가게 추천(2023년 영업 기준)
충정로역 비건이레 (방문기)
: 경기대 서울캠퍼스 근처의 작은 매장이다. 테이크아웃 전문으로 온라인 매장도 운영중. 얼그레이레몬티케이크를 비롯한 구움과자가 수준급으로 맛있다.
사당역 거북이 (방문기)
: 비건 디저트 씬에서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거북이. 다양한 종류의 비건 케이크를 만날 수 있다. 계란 알레르기가 있다면 입도 못댈 머랭케이크를 거북이에서는 맘껏 먹을 수 있다. 홀케이크도 3일전 주문하면 픽업이 가능하다.
서울숲 써니브레드(방문기)
: 글루텐프리 베이커리와 비건 베이커리를 혼용하여 판매하는 매장이다. 좌석이 넉넉한 규모로 서울숲에 인접해 나들이하기에 좋다. 비건 초코파이 케이크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