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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고 Jan 15. 2021

동쪽의 아우성

유럽이 기독교의 방주에 올라타고 중세로 헤엄쳐 가는 동안 동쪽은 어땠을까? 


두 말하면 잔소리라 할 만큼 서쪽 못지않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이 평화로운 시대가 과연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주 잠깐 동안 평화가 도래했다가도 곧 싸움을 벌이며 카오스로 돌입하는 게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사실 20세기도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그 사실을 잊곤 하는데 20세기의 절반은 엄청난 전쟁으로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국지전과 내전으로 몸살을 치렀다. 소위 제3세계의 대부분이 그렇고 우리 역사가 딱 그 표본이다. 심지어 우리는 불과 4년 전에도 앞바다에 미사일이 떨어지던 나라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상적으로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는 곳이 있다. 우리에게는 서쪽이지만 동방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곳 말이다.       

레반트 지역이 당시 얼마나 동서양 육해상로의 길목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지도 @wiki

빛은 동방에서      


문명이 동쪽에서 시작된 건 누구나 알 것이다. 라틴어 oriens, levare가 해가 떠오른다는 의미이다. 서양인들은 동방을 오리엔트라고 칭하고 동서양의 길목에서 번영했던 지역을 levare에서 유래한 레반트 levant라 불렀다. 여기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있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습지 지역이다. 오래 전에는 이곳 뿐 아니라 광대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문명의 주역이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이 있는 드넓은 평원이어야만 사람이 모여서 도시 국가가 세워지고 그런 곳이어야 문명이 발생한다. 그 비옥하던 땅이 지금은 황무지 사막이라니 이유가 궁금해진다. 잠깐 그 얘기를 해보자.  

    

수메르 쐐기문자 점토판 @maas museum
아슈르바니팔 왕 BC.8C ashurbanipal-on-his-chariot-vintage-engraved-illustration-

수메르인은 점토판에 작대기를 그어서 표기한 쐐기문자를 사용했다. 한참 뒤, 무려 3800여 년이 지난 뒤에 아시리아 아슈르바니팔 왕이 그들의 쐐기문자 점토판을 수집해서 해독하게 한다. 길가메드 서사시가 그렇게 발굴된 중동의 영웅담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숫자의 기본을 7로 보았고 천체는 7개의 행성으로 이루어졌다고 이해했다. 시간 개념은 60진법으로 파악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요일과 시간, 1년 단위가 여기서 시작된다.      

수메르의 유산 우르 지구라트 이라크 전쟁 때 미군의 군사기지로 쓰였다. @flicker


2001 저패니메이션의 걸작 메트로폴리스 -지구라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지오 엔터

기원전 2350년에는 셈족인 아카드인이 이 지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웠다. 그들은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도로를 건설한 최초의 제국이다. 도로를 따라 정기적인 우편 서비스가 이뤄졌고 토지 조사도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국가는 150여 년 후 갑자기 멸망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시 당국이 곡식을 찻숟가락으로 계량해서 배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식량부족이 심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식량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기후로 본다. 기원전 2200년 경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었다. 전 지구적인 규모로 기후가 급변했고 몇 년 동안 여름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서남아 일대는 극심한 가뭄이 300년 동안 이어져 사막화되었다. 그리고 평균기온이 2도나 낮아져 농작물 생장에 치명적이다. 건조화로 농경지가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토양의 염분이 증가하면서 땅은 더 황폐해진다. 1만 년 이래 가장 극적인 기후변화가 이 지역을 강타하면서 불모지가 된 것이다. 그나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기원전 2200년 화산 폭발,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하며 300년 동안 가뭄, 그리고 찾아온 추위  


이후 철기문화를 가진 히타이트족이 부상한다. 동부 지중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가 이어지는 레반트 지역, 지금도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바로 그곳.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보자. 함무라비 왕과 이집트 람세스 2세, 페니키아인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왕과 솔로몬 왕의 헤브라이 왕국, 모세의 가나안, 바빌론 전성기의 네부카드네자르 왕, 시리아, 아시리아 등등 가히 영광과 번영, 정복과 멸망의 이름들 아닌가.      


기원전 6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하고 제국을 세운 페르시아는 모래바람 이는 사막의 황무지에서 지중해로 진출한다. 드디어 동서양의 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식민지들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은 패배로 끝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300>이 그 기나긴 전쟁의 일부다. 20세의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군왕) 알렉산더는 10년의 원정 끝에 다리우스 3세의 죽음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다.      


사심을 담아 알렉산더      


마케도니아의 왕자로 태어난 알렉산더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과외선생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호머의 일리아드를 즐겨 읽어서 잘 때에도 베개 밑에 두었다는 그는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의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면 알렉산더가 된다고 할까. 그가 치른 모든 전투와 전쟁은 하나하나 주옥같은 전쟁 교범으로 남을 정도로 탁월했다. 불과 16세의 첫 전투에서  기병전술로 그리스 연합군 주력부대를 격파해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니 타고난 재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Battle of Issus / Alexander the Great leading his forces against the retreating Persian army led by Darius III at the Battle of Issus in 333 BCE, detail of a mosaic from the House of the Faun, Pompeii; in th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Naples, Italy. Photos.com/Thinkstock     


팔랑크스 대형의 창병과 중기병의 조합이 무적의 주력부대였다. 긴 창과 방패를 들고 빽빽하게 밀집한 창병 대형은 고슴도치를 연상시켰다. 마치 움직이는 숲처럼 적을 향해 저벅저벅 전진하면 아무리 숫적으로 우세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엄청난 대군으로 이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왜 페르시아는 항상 양으로 승부했는지 모르겠다. 단지 허구적인 묘사로만 보기에는 역대 페르시아군의 전술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피 튀기는 백병전을 벌이느라 대열이 흐트러질 때쯤 알렉산더의 기마병들이 측면을 파고든다. 갑자기 나타난 측면 공격에 중앙이 뚫리면서 페르시아 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알렉산더는 언제나 맨 앞에서 전투를 이끌었다. 반면에 다리우스 3세는 코 앞까지 몰려든 적군을 보고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겁한 왕의 모습에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페르시아의 지휘관은 개죽음보다 항복을 선택한다. 알렉산더는 그를 선처하고 심지어 측근으로 두고 사냥도 같이 하며 마케도니아 출신 측근들의 불만을 샀다. 다리우스 왕은 도망치다 부하들에게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아내와 딸들은 알렉산더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다.     


신의 아들로 표현된 알렉산더 주화 B.C 325-323


알렉산더는 전투마다 전술을 바꾸며 지형을 이용하고 심리전에 능했다. 게다가 젊은 나이의 영웅답게 분방하고 호승심도 있어서 자신을 제우스신의 아들로 그린 동전을 만들기도 했다. 지략과 정치에도 능해 위태로워진 후계구도도 절묘하게 역전시켰다. 암살된 부왕을 이어 즉위한 후 어린 왕을 우습게 본 그리스 국가들의 반란을 가볍게 진압한다. 정적은 가차 없이 제거했고 반란은 철저하게 제압하면서도 굴복하면 선처하는 강온 양면의  능숙하게 해냈다. 전해지는 일화를 보면 검소하지만 술을 좋아하고 자존심과 자신감이 엄청난 데다가 세상을 정복하는 자체를 사랑한 인물이다.      


그는 외교적 능력과 뛰어난 전략으로, 탁월한 전쟁 지휘관으로 10년 만에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한다. 우리는 기원전의 시대를 대개 십 년, 혹은 백 년 단위로 기록하지 않던가? 그는 보통 30년에 걸쳐 서술될만한 역사를 3년 만에 해치운다. 마케도니아의 군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이며, 아시아의 군주인 30세의 알렉산더는 3년의 통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인도 원정에 나섰다. 다행스럽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온다. 지금까지 정복한 땅보다 훨씬 더 큰 영토에 수많은 부족 국가와 인구가 살고 있고 밀림까지 울창한 인도 원정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리고도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반도까지 제패하겠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약탈하며 불을 지르자 화를 내며 막았다고 한다. 왕궁으로 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시아의 왕으로 꽤 시간을 보냈는데 나름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전장의 영웅은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비슷한 전쟁의 귀재 헨리 5세도 전쟁터가 아니라 침대에서 죽었으니 아이러니하다. 직접 전투에 뛰어들고 전장에서 지내다 보면 감염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기는 했을 것이다.      


정복과 통치는 다르다 


알렉산더는 제국을 통일한 지 단 3년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사후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패권다툼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시신 탈취가 벌어졌고 그의 시신은 이리저리 옮겨지며 매장과 이장을 반복한 끝에 이제는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제국은 다시 갈기갈기 분열된다.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국, 이란계 파르티아 왕국으로 독립하고 나머지는 로마에 병합되었다.      


알렉산더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어서 후대에 수많은 작품으로 형상화되곤 했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인물처럼 낭만적이고 야심 찬 주인공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용맹한 정복왕이 젊고 자유분방한 캐릭터를 가지고 심지어 요절까지 했으니 대중이 좋아할 요소는 다 갖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전쟁뿐이었다. 신화의 영웅들처럼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나 그의 왕국에는 꾸역꾸역 살아가야 할 수많은 백성들이 있었다. 통치의 틀도 갖추지 않은 채 억지로 통일된 국가는 더 큰 갈등과 분쟁을 낳았다.           


3세기가 되면 소아시아 지역은 동로마제국에 정복되고, 이란 지방은 사산조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알렉산더 사후 600년 동안 끊임없는 소모전 속에 정치는 혼란하고 경제는 피폐해졌다. 종교적 내분과 분열, 전쟁을 감당하기 위해 두 제국은 과중한 세금을 걷어들이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7세기에 이르면 거의 천 년 동안 이런 상황이 지속된 셈이다.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버티는 게 삶의 전부라면, 오랜 옛날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은 삶이라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역사를 돌이켜볼 때 사람들의 행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결국 무기력하게 소멸하거나, 하늘에서 구세주가 내려와 제발 구원해 주기를 갈망하거나.   

그리고 예언자가 구세주의 계시를 들고 나타난다. 마치 그리스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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