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아하던 뜀박질 못해서 어째?”란 말을 들었다.
달리기를 참 좋아한다. 흡연,음주같은 허접한 취향과도 관련된 유전자변이가 존재한다는데, 내 경우는 뛰는 걸 좋아하게 만드는 뭔가도 세포 속에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지난해 9월 경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정말 새로웠다. 신체적 제약으로 평생 뛸 수가 없다가 온 몸을 앞으로 계속 내던지는 그 시간이 좋았다. 평생 손가락을 못 써서 그저 달고만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손가락을 쓰는 기분이랄까.
여자에겐 왜 가슴이 있는 것일까. 종족 보전을 위해서 생긴 거겠지만 그런 거 다 필요없고 운동하고 생활할 때만 고려했을 때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2차 성징이 나타난 이후로 즐겁게 뛰어본 기억이 없었다. 돌이켜보니 그래서 자전거나 수영같은 운동만 했나 보다. 스포츠브라란 것이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고 몇 개 사보기도 했었지만 고정력이 다 형편없었다.
2년 전 운동이란 취미가 생길 무렵 생애 처음으로 압박이 잘 되는 수입 스포츠브라를 만났고 내 흉부에 자유의 바람이 불었다. 이건 내게 거의 뭐 여자의 참정권 획득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근데 벌써 뺏겼네? 부조리하다고 욕했던 우리 사회가 아니라 한없이 관대하기만 했던 내 운명에 의해서.
러닝을 안 하고 살았던 과거라면 폐를 좀 잘라내야 된다는 말에 이렇게까지 상심했었을까? (응, 뭐 있던 거 뺏기는 데 슬펐겠지) 한동안 일지 영원히 일지는 모르지만, 난 이제 시간 제한 안에 뛸 수 없어 마라톤 대회 참가도 불가하다.
그래서 암 통보를 받은 7월부터 8월까지를 운동주간으로 선포하고 열심히 뛰었다. 러너로서의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주로 뛰는 러닝코스에서는 수술 받을 병원이 보인다. 반환지에서 돌아오며 그 하얀거탑을 바라보면 잠시 가슴이 무겁다가도, 한계치를 향해 달려가는 헐떡이는 숨결에 어두운 감정이 다 날아갔다.
러닝을 빼앗기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있는 것에 감사하자. 뭔가를 씹어넘길 수 있는 소화력. 잘 자라는 머리카락, 들릴 거 다 들리는 청각...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 타인들이 우러러 보지도 않는 이런 하찮은 능력들이 사실 다 귀하디 귀한 것이었다.
물론 없는 것에 결핍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괴로워 할지라도 그 부정적 기운에 있는 능력까지 하찮게 보지는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냥 가끔 뛰는 거... 발 달린 짐승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별 거 아닌 것 같았는데 이제는 가장 가슴 아픈 추억이 되고 말았다.
러닝을 하며 도심과 자연 풍경을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이 다 내 것만 같았다. 평소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이 호흡과 신체의 반응에 따라 새롭게 재편성됐다. 5분, 1분, 10초의 시간이 때로는 한없이 늘어지고, 펄럭이는 깃발처럼 뒤틀리다가도 압도적인 파도처럼 존재를 강타하며 생을 축복했다.
매번 새로운 단위로 열정, 자신감, 끈기, 도전, 희망, 절제, 내 안의 안일함과 싸우는 통증, 타인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느끼는 동질감 등 다채로운 과실(果實)과 시각이 들어왔다. 여름방학에 곤충을 채집하는 소녀마냥 그것들을 마음속 사진첩에 담았다.
교훈을 얻었으니 실천해야지. 이제 러닝에,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찬 신체 능력에 결핍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괴롭겠지. 하지만 살아있잖아. 또 다른 방향을 향해 뛸 테니 그것에 고마워 해보자. 활기로 가득찼던 지난 사진첩이 내게 속절없는 갈증을 줄 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나이테처럼 새겼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