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부터 12월.
3개월 간의 제주살이를 계획한 건
우선 9월 퇴사해서 퇴사 당일날 바로 제주로 오게 되면서 9월에 시작하게 되었고,
끝이 12월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의 결혼식이 12월 초여서였다.
동생부부는 편의점을 운영하는데, 업종 특성상 신혼여행동안 문을 닫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유럽으로 3주나 여행을 잡아둔 데다, 안 그래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걱정인 터에..
갑자기 누나가 퇴사를 하는 호재(?)라니! 신뢰할 수 있는 고급 잉여인력이 된 나도 동생을 위한 마음 반, 백수인데 용돈벌이나 하자 반으로 대신 편의점 운영을 해주기로 하였다.
마치 눈처럼 살포시 바람 한 점 없이 내리는 고요한 겨울비의 아침.
마당의 나무들이 촉촉이 젖은 수풀길 사이로
아이가 뚱뚱히 껴 입은 연회색 롱패딩에 파란 장화, 노란 캐릭터 우산을 꼭 잡고 뒤뚱뒤뚱 걸어 나간다.
아빠에 이끌려 등원하는 아이의 모습을 거실에 앉아 통창으로 지켜보는 이 순간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 바쁘게 사라지는 토끼가 등장하는 연극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이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푸슥-
웃음이 나온다.
이제 내일부터의 주말이 지나면 이곳 제주를 떠난다.
하지만 내 손엔 이 동화 같은 집에서 1년을 살 수 있는 계약서가 있다.
이런 이별은 오히려 즐겁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런 자연이! 이런 동화 같은 삶이!
잠깐이 아니라 계속일 수 있다니!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니!!
결코 내가 부자여서가 아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언젠가 익숙해지고, 감흥이 떨어지고, 식상해지는 권태의 때가 오겠지..?
근데 그걸 왜 미리 걱정하겠는가. 지금 이 행복에 굳이 겸손하지 않겠다.
원래 행복이란 갖기 직전이 가장 큰 법!
그 고점을 마음껏 즐기며 우리는 조금 요란을 떨기로 했다.
지난번 본태 박물관에 이어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또 다른 작품인 섭지코지에 글라스하우스. 내부에 위치한 '민트 레스토랑'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코스였다. 높은 수준의 건축과 자연과 다이닝이 만나면 어떨지 기대가 가득했다. '제주 이주'라는 우리 인생의 기념비적인 순간을 특별한 곳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에 조금은 사치스러울 수 있는 장소를 택해 기분을 내보았다. 그리고 페어링 해준 와인이 입맛에 잘 맞아 안 그래도 행복지수가 상위 1%인 우리를 굳이 더 업시켜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청난 스케일의 컨버스에 펼쳐놓은 석양의 예술에 차를 멈춘다.
아까의 파인 다이닝도 좋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지겹지도 않게 또 반해버린다.
제주.
너라서 좋다.
끝없는 풀, 나무, 산등성이가 이루는 지평선.
고층 빌딩 따위는 끼어들지 못하는 태초의 평화로움.
그 선을 따라 길~게 번지는 일몰의 우아한 선홍빛 드로잉.
제주 콩깍지는 언제 벗겨질까..?
벗겨지긴 할까?
모르겠다.
그냥
너라서 좋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특별해 보인다.
잠시 머무는 숙소가 아닌
진짜 나의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