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란도나츠 Sep 30. 2024

엘베 없는 4층의 저주

10년째 심지어 대물림되는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첫 사택을 엘리베이터 없는 저층 아파트의 4층 집으로 선택한 이후부터 '엘베 없는 4층의 저주'에 걸렸다. 사택을 받아도 4층이 걸리고, 전세를 얻어도 4층이 제일 컨디션이 좋고, 그나마 좀 낫다 싶으면 4층 같은 3층이다. 도무지 4층 위로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역을 옮기더라도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12평은 됐나, 좁디좁은 쉰 살짜리 아파트저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한 층 아래. 오래전에 지은 집이라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쏟아부어 튼튼하다는 게 어른들의 말씀이었다. 좁은 집 중간을 흉물스럽게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기둥도 기둥이었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 된 사택이라 벽지가 덧방에 덧방을 거듭해 일반 벽의 두 배쯤은 돼 보이는 데다가, 모서리가 둥그스름했다. 노란 장판은 너무도 당연했다. 안쪽 새시는 나무 문이어서 열고 닫을 때 기술이 필요했고, 바깥 새시는 아주 얇은 금속제 새시로, 바람만 불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의 키도 낮았고, 방문의 키도 낮았다. 키가 162cm인 나도 170처럼 느껴지는 집이었다.

30평대 아파트에서 이사 오다 보니, 온 집에서 창고 분위기가 났다. 방 두 개에 거실 하나, 좁은 주방과 좁디좁은 한 평짜리 화장실. 앞뒤로 딸린 작은 베란다가 끝이었다. 큰 방 한쪽은 키 낮은 옷 서랍 위에 철 지난 이불과 계절 맞지 않는 옷을 담은 리빙박스가 천장까지 쌓여있었다. 그나마 대학생 딸이라고 큰 방을 내어주셨는데 전공서적 둘 책장 자리와 침대 자리를 마련하느라고 고등학교 때까지 이고 다니던 책상 두 개는 이사 전에 이미 처분해 버린 듯했다. 작은 방에는 이전에 안방에서 쓰던 12자 장롱을 반씩 나눠 작은 방 양쪽에 끼워 넣어 팬트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마저도 방문이 낮아 겨우 짜 넣었다고 했다. 장롱 문을 2/3쯤 겨우 열 만한 공간만이 남았다. (나중에 미대 입시를 위해 사촌 동생이 몇 달 우리 집에서 머물렀는데, 이 장롱 사이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창고같은 분위기를 반전시켜보겠다며 벽지에 개나리색 페인트칠까지 했다.(지금 생각하면 이게 패착이다.)이 집에서 꽤 오래 살았다. 한 5년은 살았을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인프라도 정말 좋은 집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이 집에서 살고 난 이후로 '집'에 한이 맺혔다.


이 집에서 이사 갈 기회가 생겼을 때쯤 우리는 '넓은 신축'에 반쯤 미쳐있었다. 고층 아파트가 천지에 널려있는 지역으로 이사해 놓고도 '50평'이라는 말에 혹해 저층 빌라를 선택했다. 우리가 있는 인근 아파트 평수는 넓어야 30평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에 5년쯤 살아보니, 10년 다 돼간다는 인근 집들이 신축에 비해 한참 후지게 느껴졌다. 서울의 그 집은 벽면이 아주 두꺼웠던 것과 상관없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웠는데, 당시 이 지역 아파트가 날림공사라는 소문이 있어서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고 했다. 이 또한 당시 선택에 한몫을 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곳은 이미 5년이나 살아봤는걸!


실제로 나쁘지 않았다. 그 좁은 집에 들어갔던 짐들이 널찍널찍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집에서 축구공을 차도 좋을 공간이 남았다. 여름에 살짝 덥고 겨울에 살짝 추운 이 느낌은 아마 집이 커서 그렇겠고, 신축 빌라촌이라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4층도 오르려면 숨이 조금 차지만, 이것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주방에서 거실까지 목소리를 좀 높여야 소리가 들리는 점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래, 화장실도 두 개, 방은 세 개나 됐다. 그래 잠깐 살 집이니까 넓게 살면 좋지.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저주가 대를 있어 나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거다. 남편과 결혼한 이후 사택 대기가 1년은 된다는 얘기에 지방의 한 아파트를 구했는데 아뿔싸. 엘베 없는 아파트에 또 당첨되고 말았다. 13평짜리에 두 가구 짐을 욱여넣어놓고 남편이 한대서 맡겼더니 두 달인가를 방치해 놔, 한 달이나 나 혼자 치워야 했다. 침대도 두 개, 행거도 두 사람 분량, 신혼짐과 자취짐이 뒤섞여 베란다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나의 우울증을 막아준 건 우리가 들어가기 몇 달 전쯤에 집안을 싹 리모델링을 해놔 꽃무늬 벽지나 노란 장판의 공격을 받을 일은 없었다는 거다.


그다음 지역으로 옮겨서도 우리의 선택권에는 저층 아파트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언덕 위에 있어서 다른 아파트 10층쯤 높이는 됐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할까. 화장실은 대체 어떻게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사방이 플라스틱 덧방이었다. 스텐 배수구 거름망도 빠지지 않으라고 그런 건지 강력본드를 붙여놔 대체 쓸 수가 없었다.(나중에 살다가 망치로 내려쳐 빼냈다.) 어떤 집은 집 컨디션은 아주 좋은데 세면대가 없었다. (남편은 '샤워하면서 세수하니까 세면대 없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다.) 어떤 집은 싱크대 물이 안 빠져서 보니 온갖 음식물을 그대로 버려 하수구가 막혀있었다. (썩지도 않은 걸 보니, 퇴거 일주일도 안 된 듯했다.) '4층은 안 돼'를 외치는 나 덕분에 3층으로 한 층 내려왔고, 회사에서 벽지와 장판을 새로 깔아줬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다음 집은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외쳤지만, 공허한 외침이고 바람일 뿐이었다. 다음 지역 발령을 앞두고 집을 보기 위해 공교롭게도 그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내가 (우리는 주말부부였다) 배정받은 사택을 둘러보러 왔다. 4층이라고 했다. 세상에, 또? 그런데 보니 가관이었다. 온통 3층짜리, 혹은 4층짜리 아파트뿐이었다. 후기를 보면 회사에서 리모델링을 안 해주니 누군가가 고쳐놓은 집에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곰팡이에 낙서가 가득하다는 사람들의 후기를 읽고 난 뒤 나는 마음을 먹었다. 도배장판만 깨끗하면 고다. 다행히 배정받은 집은 군데군데 벽에 붙여놓은 포스터를 뗀 자국이 20개쯤 되었지만 장판도 거의 새것이고, 벽지도 거의 새것이었다. 이 집을 한다고 했더니 관리실에서 와서 이것저것 보고는 낡은 전등을 세 갠가 LED로 교체해 준다고 했고, 덜렁덜렁거리는 콘센트도 한 갠가 새로 넣어준다고 했다.(다른 집을 더 안 봐도 되느냐고까지 물어봤다.) 내 것이 되면 좋아 보인다던가 바로 집 앞에 마을버스 출발점이 있는 점도 좋고,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파트 동과 떨어진 점도 꽤나 좋았다. (강아지가 왈왈 짖을까 봐 그렇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편과 결혼 5년 만에 같이 살다 보니 우당탕탕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점도 좋고, 회사까지 넉넉하게 30분이면 가는 (이 전에는 한 시간 거리였다) 점도 좋아졌다. 비록 겨울에 결로가 하도 생겨 베란다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 유리에 아무리 뽁뽁이를 붙이고 습기제거제를 갖다 놔도 축축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았다가 겨울이 지난 뒤에 다 버렸다. 여름에 비가 오면 베란다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사람 키만 한 빗물자국이 생긴다. 이번 여름 비가 하도 와서 여름 내내 문을 꽁꽁 닫고 살았다. 환기가 생명인 나에게는 크나큰 단점이다. 뭐 그럼 어때, 나는 일 년 뒤 이사할 건데. 이 생각으로 버텼다.


이제 또 이사를 앞뒀다. 구체적인 발령지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인근의 사택 목록을 쭉 뽑아 손품을 열심히 팔았다. 다행히 20층짜리 신축 아파트가 있단다. 모든 다른 선택지보다 집 컨디션이 좋고 평수도 무려 4평이 나 넓지만 (팬트리까지 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다.) 다른 선택지로는 30년쯤 된 아파트도 있는 것 같은데 화장실이 자주색과 분홍색이다. 대체 어떤 미적 센스가 있으면 욕조를 분홍색으로 선택하는 건지, 바닥은 자주색인 건지 싶지만 심지어 옥색 벽지를 쓴 것을 보았다. 복도식이라 옆집 아저씨 출근하는 소리, 아이들이 집에서 정겹게 투정 부리는 소리, 건강하게 뛰어노는 소리가 들린단다. 그 시간에 맞춰 남편을 출근시킬 수 있는 장점도 있다만 딱 이게 걸려 눈을 부릅뜨고 막을 셈이다. 우리는 이번에 무조건 새집으로 간다. 엘베 없는 4층의 저주에서 풀려나고 말리라. (이러다 엘베 있는 4층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참, 부모님은 그 집에 거진 10년째 눌러앉으셨다. 그 사이 4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숨이 살짝 가쁘고 짐이라도 들고 올라치면 엘리베이터 없는 게 그렇게 원망스럽다고.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워 한 달에 두세 번은 가보는데, 거실 천장이 묘하게 내려앉은 느낌도 최근에는 든다. 얼른 이사를 추천해드리고 있다. 어머니께서 한평생 마당 있는 주택을 외치셨는데, 아버지께서 하도 안 들어주셔서 직접 손품을 팔고 계시다. 최근에는 해남에 넓은 주택들이 얼마 안 한다며 가서 고구마 농사나 지으며 소일거리를 할까 하고 계시던데, 엘베 없는 4층이 나을까 고구마를 좋아하는 멧돼지나 두더지와 이웃을 하는 게 나을까.

이전 29화 난 사람으로 태어나서 잔혹하게 죽는 것은 겨우 면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