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란도나츠 Sep 23. 2024

신입이가 속 터지나요? 좋은 사수되는 팁 드립니다

본인이 기준도 없고, 토씨 하나 안 고쳐줄 거면 혼을 내질 마세요


"너 입사한 지 얼마나 됐지?"


나는 입사 삼 개월차에 입사가 딱 만 일 년 됐다는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데스킹이 난 (부장 검토를 거친 글이라는 뜻이다.) 앵커멘트가 자신의 입에 붙지 않는다면서 나를 책망하려고 자신의 자리로 불렀다. 부장이 완전히 새로 쓴 문장인 데다가, 사실 관계가 틀린 것도 없고 오타도 없고, 가만 읊조려보니 내 입에는 잘만 붙었다. 왜 나를 부른 거지?


"이거 제가 안 썼습니다. 부장이 고쳤어요.그 얘길 듣더니 그는 흠칫, 놀라는 투였다. 인상을 쓰며 거짓말을 한다는 타박이 이어졌다. 그걸 가만히 바로 뒤에서 듣던 부장이 "그거 내가 썼다. 뭐가 맘에 안 드냐."라고 거들었다. 그는 들은체만체하고는 "부장이 데스크를 했어도 마음에 안 들면 네가 고쳐야지."라며 나에게만 한 소리를 붙였다. 아니, 저는 부장 기사가 마음에 쏙 든다니까요? 결국 그 기사는 부장이 쓴 문구대로 나갔다.


그 회사에서의 4년여는 대충 이와 엇비슷했다. '마음에 안 든다' '구리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이뤄진 총평. 하도 답답해 무얼 고쳤으면 하느냐고 하면 네가 알아와야지라는 답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도 토씨 바꾸지 않고 두 시간 만에 데스킹 버튼만 누른 기사. (아참, 부장은 이유가 늘 있었고, 배울게 가득한 분이었다. 내 데스킹을 담당한 분들이 그랬다는 거다.) 외부에서 상을 받아와도 선배들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혹평의 수위는 높아졌고, 그곳에서 나는 늘 작았다. 늘 이직을 꿈꿨다.


실제로 회사를 옮겼다. 기사가 고쳐져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텃세는 심했지만, 직업적으로는 한 발자국 발전할 수 있던 곳이었다. 그다음 회사에서는 기사가 고쳐 나오는 것뿐 아니라 왜 고쳤느냐고 물으면 피드백이 돌아왔다. 기사 한 편의 절반이 고쳐져 돌아와도 배울 게 너무나 많았다. 인쇄해서 또 읽고, 노트에 옮겨 적어보기까지 했다. 부장이 썼다는 옛날 기사까지 들춰 읽었다. 첫 회사가 여기였다면 나는 감사히 배우면서 정년 퇴사할 때까지 머무르며 배운 걸 물려주고 있었을 것이다.


넷플릭스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짜요. 양념장을 너무 많이 넣으셨어요. 탈락입니다."


어젯밤을 꼴딱 새서 볼 뻔했던 넷플릭스의 신작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온 심사위원의 간단명료한 심사평이다. 왜 떨어진 건지, 왜 붙는 건지 확실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가! 다른 심사위원은 요리사에게 이 음식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먹어야 하는지, 어느 부분이 가장 맛있을지, 어떤 의도로 이 음식을 만든 건지 하나하나 물어보고, 먹고, 느꼈다.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리고 뒤에 붙이는 심사평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채소가 잘 익었어요, 요리들의 간이 안 맞아요, 고기가 고르게 익지 않았어요.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바쁘고 실력 있는 맞사수같은 모습. 


먹는 모습도 정석이었다. 고기면 고기, 채소면 채소를 뚝 잘라 넓은 그릇에 물감처럼 묻은 소스를 소스 한 방울 남기지 않으려는 듯 묻혀 한입 가득 먹는 데 보는 내내 배가 주렸다. 음식은 저렇게 먹는 거구나. 미식에 관심 없는 평범한 쩝쩝박사가 빠져들듯 보고 미식의 세계를 배웠다 느낄 정도니 참가자들은 대체 저 한 번을 통해 얼마나 많이 배웠을까. (아, 심사위원 한 명은 외식계 스타 백종원 씨고 다른 한 명은 우리나라 유일의 미슐랭 3 스타 셰프 안성재 씨라고 한다.)


얼마 전 작은 모임을 하며 알게 된 분들이 요청하기에, 부족한 솜씨지만 글쓰기 강좌를 열어 드렸다. (돈은 안 받았다!) PPT를 정성껏 준비했고(PPT도 무료 배포였다) 사람들을 웃기기까지 했다. 어쨌든 다들 이해는 한 것 같다. 글은 안 써보면 모르는 거 아닌가. 에세이를 한 편씩 써 오면 한 분당 한 편씩 첨삭도 봐드리겠다고 했다. 개꿀 아닌가! 나는 손해고.


사실 글 써올 사람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그날 당장 한 편이 도착했다. 모임 중 내 또래 한 분이 이미 써놓은 글 한편을 가져온 거다. 블로그를 꽤 오래 하셨다고 했다. 에세이는 처음이라고도. 그래서인가 글은 블로그 문체를 많이 띄었고, 거칠었고, 생각의 흐름도 띄엄띄엄 구멍이 있었다. 이날 새벽 한 시까지 글에 대해서 좀 더 부연을 했다. (내가 정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초심자보다 낫지 않겠느냐며) 그러고도 설명이 부족한가 싶어 지인들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브런치 주소까지 알려드렸다. 다시 말하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쯤엔가 그분에게서 A4용지로 두장 조금 못 미치는 길이의 에세이가 한편 도착했다. 전에 읽어봤을 때와 비슷한 주제이기는 한데, 완성도가 한참 높았다. 고등학교 작문 수준에서 대학교 3학년 수준까지 단숨에 올라와 있었다. 뭐지, 대체 비결이 뭔가요? 내가 묻자 그는 내 글을 정독하고, 제시했던 것들을 모조리 글에 적용했다고 했다. 뿌듯하면서 씁쓸했다. 8년간 혼자 고군분투한 시간이 떠올랐다. 혹평의 이유라도 알았다면, 방법이나 기준이라도 알았다면 나도 빨리 클 수 있었겠구나. 인생 오래 곱씹어봤자 뭐 하겠느냐만,  그 밤에 잠에 든 남편 옆에 뜬 눈으로 누워 나를 부둥켜안고 위로의 말을 삼켰다.


그런데 이 참에 글쓰기 업계로 나가야 하나? 내가 미슐랭 3 스타급 족집게 평가도 하고, 인간미 있는 첨삭도 하는 거 같은데 말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다. 진심일 수도 있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