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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Sep 18. 2024

나는 대학시절 소매치기 감별법을 전공했단 사실

제가 소매치기라고요? 네가 아니고?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는 낯선 남자의 손을 잡았다."


유럽에 가기 전, 지인에게 들은 지인의 지인의 소매치기 경험담이다. 들은 내용틀 토대로 이야기를 가공해 보자면 한 20대 한국인 대학생이 예쁘고 팔락 팔락 거리는 품이 넓은 바바리코트를 바람과 함께 펄럭이며 영국의 밤길을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습관처럼 시간이라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넣어둔 코트 바깥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물컹. 휴대폰만 뒹굴어야 할 주머니엔 웬 남자의 손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뉘신지? 졸지에 서로 손까지 잡은 사이였지만 남자는 매정하게 달아났다. 이름도 성도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그 휴대폰까지 훔쳐 들고.


"명품이 아니라 지갑은 돌려주더라."


이건 영국 유학을 통해 지식인으로 성장한 내 올케 동생의 얘기다. 가족들과 파리 여행을 갔는데 지하철 출입구 쪽에서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참고로 지하철 출입구는 가장 많이 소매치기를 당하는 곳이다. 우리와 다르게 버튼을 눌러서 여는 식이라서 방어할 손이 하나 비는 것도 있고, 문 닫히면 끝이니까 도망치기도 쉽다고.) 정말 아무 느낌도 안 났는데 눈앞에서 웬 휘파람 소리가 나서 보니 자기 지갑을 들고 있었다고. 그리고 휙 뭔가를 닫히는 문 사이로 던쟜다고 했다. 여권과 지갑. 여권은 가져가봤자 쓸데가 없고 올케 동생은 없으면 곤란한 것이니 던져준 게 아니겠냐는 나름의 두둔까지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양심적인 소매치기를 봤나. 이 여행에서 사돈댁은 몇백을 털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파리 올림픽 때 유럽의 모든 소매치기가 파리로 온 것 같다는 관광객의 이야기나, 심지어 도난 방지를 위 선수단 버스를 아예 테이프로 꽁꽁 싸매놓았다든가 하는 주로 소매치기 관련한 내용도 기사로 본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카페 자리를 맡을 때 휴대폰이나 노트북, 가방을 두고 가는데 이런 일은 유럽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얘기는 너무 오래된 기사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고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고 하니 이번 3박 5일 파리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것도 패럼림픽 직후이므로) 가장 신경 썼던 건 아무래도 지갑 보안이었다. 아무래도 잃어버리면 상당히 곤란해지는 액수를 환전해야 하느니만큼, 동전지갑도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남편은 여행 내내 나를 막아섰다. 라오스에서 사 온 코끼리 지갑의 귀여움을 파리에도 알려줬어야 하는데, 젠장.


그래서 결국 나와 남편은 청바지에 뮤지엄패스(이것도 이제 10만 원 돈 한다.) 1장과 카드 1개, 휴대폰과 비상용 20유로를 청바지의 아주 작은 주머니에 꼬깃꼬깃 세 번 접어 넣어 다녔다. 추운 날씨 탓에 점퍼를 가져가 주머니가 가려 이걸 넣었다는 것마저 잘 안 보였다. 남편은 재킷 안주머니에 물이나 바게트 따위를 재킷 안주머니에 싣고 다니는, 훌륭한 도시락이었다. 우리는 훔쳐갈 게 빵조가리밖에 안 나올 거라며 낄낄댔다. (돈 없는 게 자랑이다.)



대신 카드를 주머니에 한 장 덜렁덜렁 들고 다니며 썼다. 요즘 소비유행을 선도하는 나로서는 써보지 않을 수 없던 트래블카드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광고 아니다.) 유로 환전 수수료가 없고,  환전해 둔 돈을 빼서 쓰는 체크카드 개념인 데다  해외 결제 수수료도 안 붙는다고 해서 유용하게 썼다. 현금으로 뽑은 건 실물로 400만 환전했다. 이마저도 숙소 비용이라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정말 지킬 돈이 없던 셈이다. (돈 아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전거 보증금 때문에 1200유로를 추가 환전까지 해서 파리 시에 맡겨놓느라 결국 더 썼지만 말이다. 돌려주는 데 2주는 걸린다고 한다. 망할 놈들. 돈 빼가는 건 빠르고 돌려주는 건 느리지.) 준비성이 철저한 남편은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에 내가 챙겨 온 비자 카드 하나를 비상용으로 하사 받았다.(체크카드가 안 먹히는 공항에서 두 번 썼다.) 게다가 동남아의 분위기와 엇비슷하게 자전거가 상용화되어 있는 파리의 출근길 모습에 발맞추어 우리는 자전거를 타게 되면서 지하철, 버스 소매치기의 표적에서 벗어났다. (자전거가 워낙 빨라 가방을 대충 메다가는 소매치기를 당할 있을 같기는 했다.)


이런 나도 피해 갈 수 없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귀국길이었다.


아무리 티를 안 내려 애써도 신혼여행 때 세일해서 좋다고 샀던 대형 캐리어가 문제였다. 우리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알리는 듯 빨간색 고운 자태를 뽐냈다. 다행히 우리 고양이(지난 에피소드에 나왔던 녀석이다.)가 여러 차례 그 캐리어 위에 올라 새 캐리어를 발톱으로 긁어대 천이 뜯겨나간 자국이 곳곳에 있어 새것 티가 안 나고 대신 '없어 보인다'면 다행일까. 휴. 그런데, 저녁 8시 30분 비행기를 타려 서두르다가 파리 교외로 나가는 퇴근길을 마주한 것이다. 세상에, 파리도 퇴근지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말 다양한 인종에 뒤섞여 지하철을 기다렸다. 언뜻 불량해 보이는 무리의 시선을 받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치타 앞의 가젤이 된 느낌을 받으며 바지 왼쪽 앞주머니 속 카드가 있는지 자꾸 만져봤다. (사실, 이러면 시선을 더 주머니 쪽으로 끈다고 한다.) 오른쪽 주머니 휴대폰은 병적으로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지하철이 도착했는데 이미 만실이었다. 남편은 어떻게든 뚫어보겠다며 캐리어와 자신의 몸을 먼저 밀어 넣었고, 캐리어와 남편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남편의 등이 절반만 남게 보일 때쯤 정신을 차리고 딱 한 발자국 남은 지하철에 내 몸을 실었다. 아니, 실으려던 찰나였다.


내 바로 앞에 있던 초콜릿 색 진한 피부를 가진 흑인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아저씨는 어깨 뒤로 접근하는 나를 번득이는 눈으로 힐끗댔다. 유럽 거주 3일 촉으로 이건 소매치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눈을 너무 크게 뜨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주시하는 눈길이 충분히 수상했다. 공항이 코앞인데 소매치기를 당할 수는 없지.  나는 왼쪽 앞주머니를 사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앞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안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기를 쓰고 빼내어 내 앞 주머니 쪽으로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확신했다. 이건 소매치기나 성추행범이야!


이런 확신이 들었으면 지하철을 타지 않는 게 현명하건만,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남편은 나만 믿으라며 지하철에 가방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인파에 쓸려 안쪽으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걸 타지 않으면 남편과 헤어지게 된다. 이 차를 타지 않으면 안 됐다. 의지와 다르게 인파를 따라 지하철 안으로 속절없이 밀려들어가는 남편의 등을 보며 왼쪽 바지 앞주머니(잊었을까 봐 말하는데, 파리에서 결제할 수 있는 체크카드가 들어있다.)를 사수하려 왼손을 뻗어 카드가 있는지 계속 확인했다. 이 흑인 아저씨의 손은 내 왼쪽 주머니 코앞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뭔가 이상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지하철 안으로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가지 못했다. 아저씨도 최대한 지하철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며(?) 내 바지 주머니를 털려는 것처럼 보였다.


소매치기라면 지하철에 가둬주지. 이 생각이 든 나는 내 왼쪽 앞주머니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이 아저씨를 지하철 안으로 몰아붙였다. 이 주머니에 대체 얼마가 들어있는데 뺏길 순 없다. 그렇게 나는 지하철 출입구 안쪽으로 들어섰고, 내 뒤에도 두어 명이 탔다. (80년대 지하철을 생각하면 된다. 밀어 넣는 사람만 없을 뿐.) 그런데 순간순간 이 아저씨의 손이 묘하게 반대쪽으로 향해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오른쪽 뒷주머니를 사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아끼 힐긋대던 눈빛에 불안감이 섞여있던 같기도 하고.


'아니, 제가 소매치기였나요?'


내 입장에서야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로 향하는 그 아저씨 앞의 남편을 뒤따르고 있었지만, 아저씨가 뭔가. 어쨌든 지하철은 붐볐고, 나는 지하철 끄트머리를 겨우 잡아 타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무리 선하게 생긴 인상이라지만 이 아저씨 입장에서는 이 놈이 지갑을 들고 지하철 타고 튈 건지 관상만 보고 어찌 알겠는가. 나는 이 아저씨와 함께 서로 오해를 가득 싣고 팔을 맞댄 채 지하철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나는 지하철 안에서도 소매치기가 아니면 성추행범일 것이라는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아저씨를 포함해 지하철 내 모든 남성들이 나랑 최대한 닿지 않게 거리를 뒀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의심해서 죄송할 따름이다.)  남편을 겨우 찾아서는 캐리어를 잡았다가, 카드를 확인했다가, 휴대폰을 확인했다가 1초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확인하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그렇게 20분여를 가서야 사람이 조금 빠져 앉을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이 아저씨는 내게 소매치기도, 성추행범도 아니었고, 나도 이 아저씨에게 소매치기도, 성추행범도 아니었다. 휴, 대신 또 뭇 남성에게 잊지 못할 여인이 되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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