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을 길 묘연하지만, 타볼 만하다.
그렇게 루브르 박물관을 횡으로 통과하며 보행 속도보다 한층 빨라진 나의 속력을 즐겼다. 파리의 선진 문물, 자전거 시스템은 완벽에 가깝게 느껴졌다. 대부분 길에 자전거 도로가 따로 널찍하게 나 있어, 자전거를 타다 차에 치일 것 같은 느낌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전거 도로가 좁은데, 여기는 사진에서처럼 차로만큼 자전거 도로를 넓게 만들어둔 곳도 있다. 자전거 전용도로와 차로가 연석으로 구분되어 있어 조금 더 안심이고, 추월할 넓이만큼을 따로 빼놓았다.) 전용도로가 없는 길이라도 길바닥에 자전거 표시가 되어있는 길로 다니면 됐다. 몽마르뜨 언덕 쪽만 아니면 길도 거의 평지여서 초행길이라도 지도만 보면 다니기 어렵지 않았다. (지도를 보라고 휴대폰 거치대가 달려 있다.)
의외로 차보다 자전거가 위험했다. 자전거를 타는 내내 가장 위협적이었던 건 파리의 직장인들이었다. 누가 봐도 직장인인 정장이나 세미캐주얼을 입고, 자전거 뒷바퀴 위쪽에 도시락 가방 두 개를 매달고 자전거 도로를 휙휙 질주했다. 다들 직장에 가고 싶어 죽겠는 사람들처럼 시속 50km쯤이나 되는 속도로 지나쳐갔다. 게다가 벨은 장식으로 달아놓은 건지 추월하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달리는 재주가 모두에게 탑재돼 있었다. 쉭 바람 소리만 남기며 지나갈 때면 가슴이 철렁철렁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숏다리 인 데다 운동량도 부족하고, 지리에도 익숙하지 않으니 아마 꼬마애가 세 발 자전거 타는 속도로 느껴졌을 거다. '누가 뒤에서 끄는 것 같아?'라는 남편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달릴 수가 없었다. (지금 글 쓰는 와중에도 '파리에서 한 대도 추월해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도나츠 자전거를 앞질렀다'며 놀리고 있다.) 우리 엄마는 운전할 때도 느려도 사고 안 나는 게 최선이라고 나를 가르치셨다. 오른쪽으로 최대한 붙어 길을 터 줄 테니 위험한 추월은 네놈들이 하거라.
한 번은 실제로 치일 뻔한 데다가 욕까지 찰지게 먹었다. 왼쪽으로 가겠다고 왼팔을 들어 표시를 하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빠르게(아마 느렸겠지만) 왼쪽으로 이동하는데 뒤에서 으으-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엥? 누가 오나?' 싶어 왼쪽으로 휙 붙다가 자전거와 함께 몸이 넘어갈 뻔했다. 겨우 핸들을 붙들어 잡았는데, 그 순간 누가 오른쪽을 휙 지나쳐갔다. 대체 어떤 놈이 추월한다면서 수신호도 안 보고 들이대나 얼굴이나 보자 싶어 노려봤는데, 그 순간 그놈이 '왓더뻑'이라며 내 눈을 똑바로 보며 프랑스인답지 않은 능숙한 욕을 크게 내뱉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연습이라도 한 건가, 욕이 참 찰졌다. 네가 뭘 잘했길래 욕을 박냐며 한 마디 해주려다가 그놈은 190cm도 되어 보여 내가 몸싸움으로는 질 것 같은 데다, 그놈은 박치기를 대비해 헬멧까지 썼고, 무엇보다 프랑스 사람처럼 보여서 경찰서라도 가면 내가 곤란해질 게 뻔해 시비를 털려도 참기로 했다. 누군 욕을 못 해서 안 하는 줄 아나. 예의범절이라고는 부르기뇽에 끓여 먹은 놈아. (부르기뇽은 프랑스식 갈비찜이다.)
며칠 지켜보니, 파리 자전거들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유는 파리 사람들의 암묵적인 룰 때문이다. 초록불에만 지나가라는 법규는 차에만 해당하는 소리고, 보행자와 자전거는 차가 없으면 지나가는 게 국룰이었다. (파리 자전거족의 교통법규 준수율은 우리나라 배달 오토바이 수준일 거다.) 긴가민가했는데, 경찰관 앞에서 무단횡단을 해도 잡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내 얘기가 아니다.) 지나가는 차가 없는데, 빨간불에 서 있으면 무조건 파리가 첫 날인 관광객이라는 짐작까지 왔다. 이게 자전거를 타는 우리에게 좋기도, 나쁘기도 했다. 신호를 안 지켜도 되니 사람이나 차가 없으면 지나가면 되니까 자전거를 한 번 타면 거의 멈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반대로 말하면 보행자 쪽 신호를 믿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 놈이 지나갈 놈인지, 파리가 처음인 놈인지 얼굴만 보고 알 수가 없으니 자전거가 지나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나갔고, 모르는 사람과의 아이컨택을 즐기는 나는 머뭇머뭇 대거나,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걸 택했다. 그러다 나중엔 어찌어찌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며 '자라니'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빨간 불을 지나갈라치면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해대는 건 끝까지 멈추지 않더라.
이런저런 일들이야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벨리브를 탄 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파리의 쿰쿰한 지하철이 아니라 시내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하나하나 보며 찬 바람을 가르는 것도 추운 걸 빼면 꽤나 낭만적이었다. 낮 시간이 페달을 밟을 때마다 지나치는 마른 강바람이 땀을 식혔다. 파리 시내를 구석구석 보며, 새벽에는 사람 없는 거리를, 주중에는 직장인들 사이 관광객의 여유를 즐기고, 느릿느릿 흘러가는 센 강 옆 수백 년 된 창살과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자전거 덕분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당근을 켜서 중고 자전거를 검색 중이다.) 무려 300만 원 가까이 항공권을 끊어와서 쥐가 들끓고 소변 지린내가 나는 데다 소매치기가 들끓는 지하를 쏘다니는 것보다는 아무렴 느릿느릿하더라도 시원한 바깥공기가 낫지 않았을까.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비록 아직까지 보증금으로 낸 1200유로의 행방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