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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Sep 27. 2024

난 사람으로 태어나서 잔혹하게 죽는 것은 겨우 면했다

가장 최근 케어의 게시물들을 보고


지난해 회사를 옮기고 얼마 돼서 부장 분이 회사 앞의 맛집에 가보자고 꼬드겨 명이 모였다. 소고기 구이로 유명한 곳이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데다 여기가 일 인분에 5만 원은 한다고 하는데, 이게 떡이람. (부장과의 식사임에도) 신나서 가겠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삼삼오오 모여 다들 사무실을 떠나고 셋이서 느지막하게 사무실을 떴다. 사무실에서 3분 거리. 구내식당만큼이나 가까웠다. 룸이 예약돼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실했던) 밑반찬이 이미 깔려 있었다. 이미 시켰다고 했다. 서비스 좋고. 앞에 놓인 샐러드나 집어 먹고 있는데, 탕이 하나 도착했다. 샤부샤부인가, 탕이 펄펄 끓는 아니고 저온으로 었다. 소고기는 팔팔 끓는 데에 넣는 게 제맛 아닌가?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데 소도둑 몸집을 가진 거대한 사장님이 갑자기 룸 안으로 들어왔다. 본인 팔뚝보다 큰 문어 한 마리를 잡아들고. 대체 녀석은 데려오셨나요? 휘둥그레 눈이 떠졌다. 사장님은 살아있는 봤으니 넣는다며 말릴 새도 없이 낙지를 눈앞에서 탕에 집어넣었다. 아니, 집어넣었다고 하는 표현은 옳지 못하다. 문어 다리의 절반도 잠기지 않았으니까. 문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죽여서 오시면 안 될까요? 싱싱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손님들이 이런 걸 요청한단다. 나 외엔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토할 같았다. 그날 문어는 15분 넘게 고통당하다 사망했다. 나는 식사 시간 내내 덜덜 떨었다. 국물 입도 떠먹지 않았다. 밥도 그릇도 못 먹었다.


그 한 달 전에는 조개구이 집에서 타사 선후배와 저녁이 있었다. 조개구이가 메뉴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살아있는 죄 없는 생물을 뜨거운 불판 위에 올려놓고 뜨거워서 몸부림치고 결국에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끓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고문이고 큰 심적 고통이었다. 나는 이거 못 먹어. 그랬더니 후배가 저는 할 수 있으니까 제가 할게요, 하며 조개를 척척 집어 올렸다. 그나마 내가 이날 늦게 도착해서 그 모습을 많이 못 봤고, 내가 갈 때쯤에는 이 집 조개가 덜 신선해서 이미 죽은 놈들이 많았던 게 다행이다.


지난해 결혼 기념으로 남쪽 어드메를 여행하다 조개구이집을 갔을 때는 남편과 결국 싸움이 난 적도 있다. 사실은 내가 여기가 맛집이라며 가자 해놓고 이런 상황은 생각 못한 게 컸다. 아, 조개구이는 원래 살아있는 조개를 굽는 거였지. 이날 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 조개를 불판에 올리지도 못했다. 못 먹겠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도대체 이럴 거면 조개구이를 먹으러 왔느냐며, 큰돈을 주고도 먹는 내내 싸움이 났다.


그보다 전 해에는 강원도 동해안의 한 수산시장에 회를 뜨러 갔다. 지느러미 쪽을 찔러 죽인 뒤에 회를 뜨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한 할머님은 물고기를 세로로 세우고 으드득, 소리가 나게 목을 잘랐다. 뼈가 단단해 잘 잘리지 않았다. 1/3 쯤 뎅강 잘린 머리가 보였다. 물고기는 살아서 버둥거렸다. 앞에서 보는 모두가 이건 좀 너무 잔인하다고 수군거렸다. 할머니는 들은 체도 않고, 서너 번에 걸쳐서 물고기를 잔인하게 참수시키고 말았다. 몇 달 뒤엔가 동물단체에서 이런 모습을 고발하는 것도 봤다. 바뀌었기를 바란다.


내가 비위가 약한 건 아니다. 나는 작년도 수해 때 양계장이 폭우에 침수돼 닭들이 이미 죽었거나 다 죽어가는 현장에 간 적도 있다. 닭 죽은 냄새가 가장 지독하다. 세네 시간 동안 그 냄새를 맡고도 나는 괜찮았다. 심지어 똥이 불어나 가득 찬 계사 안에서 발이 빠져 30분 넘게 서 있어야 했어도 괜찮았다. (이날 감정이 북받쳐 닭 수만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라고 했다가 '운명하셨다'라거나 '별세하셨다'라고 하지 그랬냐는 놀림을 받았다.)하지만 더 지독한 건 아직 살아있는데 죽은 친구들의 사체와 함께 사체 취급을 받는 닭들의 처지다. 닭은 물에 취약하다고 했다.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직 힘이 남아 있어서 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닭에게 우산을 씌워서 그나마 잠시 비라도 안 맞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아마, 곧 죽었을 테지만. 사체 밑에 깔려 꿈틀대던 아직 살아있던 닭들은 그대로 포대기에 담겨 처리 시설로 옮겨졌다.

어제 아침, 동물단체 케어에서 올린 한 게시물을 봤다. 서울에 있는 한 해산물 전문점이라는 것 같았다. 랍스터의 허리를 손으로 분지르고 아랫부분은 회로 뜨고, 윗부분은 살아있는 채로 다리에 꽃을 꽂아 부글부글 끓는 탕 위에 올린다는 거다. 랍스터는 살아있는 채로 허리부터 끓는 물에 익어 올라오다가 꽃을 든 채로 춤추듯 움직이다가 결국 죽는다고 했다. 그 식당에 온 사람들은 랍스터가 몸부림치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전날엔 살아있는 개를 매달아 불태워 잡아먹으려다 탈출해 도망친 개의 소식이 올라왔다. 구조를 하려 했는데, 온몸에 화상을 입고 도망 다니가 죽었다고 했다. 한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이건 마치 유럽에서 중세시대에 마녀 화형식을 구경하는 것, 참수된 시신을 구경했다는 IS와 뭐가 다른가.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잔혹하게 죽는 것만은 겨우 면했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동물의 왕국이며 다큐멘터리며 무엇을 보아도 다른 동물에게 고통을 주며 죽이고 잡아먹는 걸 이렇게 즐기는 동물은 인간 외에는 없다. 목을 물어 죽이는 그 본능에 따르는 육식 동물들도 필요 이상으로 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식탁 위에서만 생명을 봐서 그런가, SNS로 인기를 얻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하다가 선을 넘어버린 걸까, 생명체가 아니라 '먹을 것'으로만 보는 이 시선들이 무섭다. 점점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다 그저 태어나서 사는 것들이다.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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