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첫 사택을 엘리베이터 없는 저층 아파트의 4층 집으로 선택한 이후부터 '엘베 없는 4층의 저주'에 걸렸다. 사택을 받아도 4층이 걸리고, 전세를 얻어도 4층이 제일 컨디션이 좋고, 그나마 좀 낫다 싶으면 4층 같은 3층이다. 도무지 4층 위로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역을 옮기더라도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12평은 됐나, 좁디좁은 쉰 살짜리 아파트저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한 층 아래. 오래전에 지은 집이라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쏟아부어 튼튼하다는 게 어른들의 말씀이었다. 좁은 집 중간을 흉물스럽게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기둥도 기둥이었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 된 사택이라 벽지가 덧방에 덧방을 거듭해 일반 벽의 두 배쯤은 돼 보이는 데다가, 모서리가 둥그스름했다. 노란 장판은 너무도 당연했다. 안쪽 새시는 나무 문이어서 열고 닫을 때 기술이 필요했고, 바깥 새시는 아주 얇은 금속제 새시로, 바람만 불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의 키도 낮았고, 방문의 키도 낮았다. 키가 162cm인 나도 170처럼 느껴지는 집이었다.
30평대 아파트에서 이사 오다 보니, 온 집에서 창고 분위기가 났다. 방 두 개에 거실 하나, 좁은 주방과 좁디좁은 한 평짜리 화장실. 앞뒤로 딸린 작은 베란다가 끝이었다. 큰 방 한쪽은 키 낮은 옷 서랍 위에 철 지난 이불과 계절 맞지 않는 옷을 담은 리빙박스가 천장까지 쌓여있었다. 그나마 대학생 딸이라고 큰 방을 내어주셨는데 전공서적 둘 책장 자리와 침대 자리를 마련하느라고 고등학교 때까지 이고 다니던 책상 두 개는 이사 전에 이미 처분해 버린 듯했다. 작은 방에는 이전에 안방에서 쓰던 12자 장롱을 반씩 나눠 작은 방 양쪽에 끼워 넣어 팬트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마저도 방문이 낮아 겨우 짜 넣었다고 했다. 장롱 문을 2/3쯤 겨우 열 만한 공간만이 남았다. (나중에 미대 입시를 위해 사촌 동생이 몇 달 우리 집에서 머물렀는데, 이 장롱 사이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창고같은 분위기를 반전시켜보겠다며 벽지에 개나리색 페인트칠까지 했다.(지금 생각하면 이게 패착이다.)이 집에서 꽤 오래 살았다. 한 5년은 살았을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인프라도 정말 좋은 집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이 집에서 살고 난 이후로 '집'에 한이 맺혔다.
이 집에서 이사 갈 기회가 생겼을 때쯤 우리는 '넓은 신축'에 반쯤 미쳐있었다. 고층 아파트가 천지에 널려있는 지역으로 이사해 놓고도 '50평'이라는 말에 혹해 저층 빌라를 선택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인근 아파트 평수는 넓어야30평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에 5년쯤 살아보니, 10년 다 돼간다는 인근 집들이 신축에 비해 한참 후지게 느껴졌다. 서울의 그 집은 벽면이 아주 두꺼웠던 것과 상관없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웠는데, 당시 이 지역 아파트가 날림공사라는 소문이 있어서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고 했다. 이 또한 당시 선택에 한몫을 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곳은 이미 5년이나 살아봤는걸!
실제로 나쁘지 않았다. 그 좁은 집에 들어갔던 짐들이 널찍널찍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집에서 축구공을 차도 좋을 공간이 남았다. 여름에 살짝 덥고 겨울에 살짝 추운 이 느낌은 아마 집이 커서 그렇겠고, 신축 빌라촌이라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4층도 오르려면 숨이 조금 차지만, 이것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주방에서 거실까지 목소리를 좀 높여야 소리가 들리는 점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래, 화장실도 두 개, 방은 세 개나 됐다. 그래 잠깐 살 집이니까 넓게 살면 좋지.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저주가 대를 있어 나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거다. 남편과 결혼한 이후 사택 대기가 1년은 된다는 얘기에 지방의 한 아파트를 구했는데 아뿔싸. 엘베 없는 아파트에 또 당첨되고 말았다. 13평짜리에 두 가구 짐을 욱여넣어놓고 남편이 한대서 맡겼더니 두 달인가를 방치해 놔, 한 달이나 나 혼자 치워야 했다. 침대도 두 개, 행거도 두 사람 분량, 신혼짐과 자취짐이 뒤섞여 베란다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나의 우울증을 막아준 건 우리가 들어가기 몇 달 전쯤에 집안을 싹 리모델링을 해놔 꽃무늬 벽지나 노란 장판의 공격을 받을 일은 없었다는 거다.
그다음 지역으로 옮겨서도 우리의 선택권에는 저층 아파트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언덕 위에 있어서 다른 아파트 10층쯤 높이는 됐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할까. 화장실은 대체 어떻게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사방이 플라스틱 덧방이었다. 스텐 배수구 거름망도 빠지지 않으라고 그런 건지 강력본드를 붙여놔 대체 쓸 수가 없었다.(나중에 살다가 망치로 내려쳐 빼냈다.) 어떤 집은 집 컨디션은 아주 좋은데 세면대가 없었다. (남편은 '샤워하면서 세수하니까 세면대 없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다.) 어떤 집은 싱크대 물이 안 빠져서 보니 온갖 음식물을 그대로 버려 하수구가 막혀있었다. (썩지도 않은 걸 보니, 퇴거 일주일도 안 된 듯했다.) '4층은 안 돼'를 외치는 나 덕분에 3층으로 한 층 내려왔고, 회사에서 벽지와 장판을 새로 깔아줬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다음 집은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외쳤지만, 공허한 외침이고 바람일 뿐이었다. 다음 지역 발령을 앞두고 집을 보기 위해 공교롭게도 그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내가 (우리는 주말부부였다) 배정받은 사택을 둘러보러 왔다. 4층이라고 했다. 세상에, 또? 그런데 와 보니 가관이었다. 온통 3층짜리, 혹은 4층짜리 아파트뿐이었다. 후기를 보면 회사에서 리모델링을 안 해주니 누군가가 고쳐놓은 집에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곰팡이에 낙서가 가득하다는 사람들의 후기를 읽고 난 뒤 나는 마음을 먹었다. 도배장판만 깨끗하면 고다. 다행히 배정받은 집은 군데군데 벽에 붙여놓은 포스터를 뗀 자국이 20개쯤 되었지만 장판도 거의 새것이고, 벽지도 거의 새것이었다. 이 집을 한다고 했더니 관리실에서 와서 이것저것 보고는 낡은 전등을 세 갠가 LED로 교체해 준다고 했고, 덜렁덜렁거리는 콘센트도 한 갠가 새로 넣어준다고 했다.(다른 집을 더 안 봐도 되느냐고까지 물어봤다.) 내 것이 되면 좋아 보인다던가 바로 집 앞에 마을버스 출발점이 있는 점도 좋고,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파트 동과 떨어진 점도 꽤나 좋았다. (강아지가 왈왈 짖을까 봐 그렇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편과 결혼 5년 만에 같이 살다 보니 우당탕탕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점도 좋고, 회사까지 넉넉하게 30분이면 가는 (이 전에는 한 시간 거리였다) 점도 좋아졌다. 비록 겨울에 결로가 하도 생겨 베란다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 유리에 아무리 뽁뽁이를 붙이고 습기제거제를 갖다 놔도 축축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았다가 겨울이 지난 뒤에 다 버렸다. 여름에 비가 오면 베란다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사람 키만 한 빗물자국이 생긴다. 이번 여름 비가 하도 와서 여름 내내 문을 꽁꽁 닫고 살았다. 환기가 생명인 나에게는 크나큰 단점이다. 뭐 그럼 어때, 나는 일 년 뒤 이사할 건데. 이 생각으로 버텼다.
이제 또 이사를 앞뒀다. 구체적인 발령지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인근의 사택 목록을 쭉 뽑아 손품을 열심히 팔았다. 다행히 20층짜리 신축 아파트가 있단다. 모든 다른 선택지보다 집 컨디션이 좋고 평수도 무려 4평이 나 넓지만 (팬트리까지 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다.) 다른 선택지로는 30년쯤 된 아파트도 있는 것 같은데 화장실이 자주색과 분홍색이다. 대체 어떤 미적 센스가 있으면 욕조를 분홍색으로 선택하는 건지, 바닥은 자주색인 건지 싶지만 심지어 옥색 벽지를 쓴 것을 보았다. 복도식이라 옆집 아저씨 출근하는 소리, 아이들이 집에서 정겹게 투정 부리는 소리, 건강하게 뛰어노는 소리가 들린단다. 그 시간에 맞춰 남편을 출근시킬 수 있는 장점도 있다만 딱 이게 걸려 눈을 부릅뜨고 막을 셈이다. 우리는 이번에 무조건 새집으로 간다. 엘베 없는 4층의 저주에서 풀려나고 말리라. (이러다 엘베 있는 4층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참, 부모님은 그 집에 거진 10년째 눌러앉으셨다. 그 사이 4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숨이 살짝 가쁘고 짐이라도 들고 올라치면 엘리베이터 없는 게 그렇게 원망스럽다고.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워 한 달에 두세 번은 가보는데, 거실 천장이 묘하게 내려앉은 느낌도 최근에는 든다. 얼른 이사를 추천해드리고 있다. 어머니께서 한평생 마당 있는 주택을 외치셨는데, 아버지께서 하도 안 들어주셔서 직접 손품을 팔고 계시다. 최근에는 해남에 넓은 주택들이 얼마 안 한다며 가서 고구마 농사나 지으며 소일거리를 할까 하고 계시던데, 엘베 없는 4층이 나을까 고구마를 좋아하는 멧돼지나 두더지와 이웃을 하는 게 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