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나는 입안에 있던 사랑니 모두와 이별을 고했다.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오른쪽 아래 어금니를 비집고 올라오는 한 놈의 모양새가 치아 치고 특히 예쁘게 생겼길래 (이런 이유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오래오래 입 안에 보관해 왔는데, 오늘 아침 치과 첫 손님으로 가 빼버렸다.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조금씩 상승 욕구가 솟구칠 때마다 옆 어금니를 좀 밀면서 나오다가 지난주에는 잇몸을 더 찢고 나오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신경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미련이 남기보다는 이젠 후련하기까지 하다.
내 사랑니들은 죄다 20대 후반에 하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제 치아 쓰는 게 좋다고 하는 걸 곧이곧대로 듣고 사랑니 뽑는 게 아까워 치과 갈 때마다 뽑자, 뽑자 하는 걸 30살 되기까지 버텼다. 30이 됐을 때에 마침 집 앞에 사랑니 발치 전문 치과가 생겼길래 비교적 못 생긴 두 개를 하루에 빼버리고 (이러면 안 된다고 하긴 하더라) 그쯤 잇몸을 찢으며 머리를 빼꼼히 내민 이놈은 내버려 두었다.
결국 두 달 전엔가 오른쪽으로 밥을 씹다가 시큰거리는 느낌이 시도 때도 없이 나서 내 발로 치과 문턱을 넘고 말았다. 20분엔가 기다려 전문의 분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소아 치과 전문의이신 듯했다. 어떻게 알았느냐면 크록스에 귀여운 캐릭터가 다글다글 하고, 들고 계신 펜이나 입고 있는 그 복장에도 귀여운 캐릭터들이 다글다글 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곳을 찾아온 것 같다는 느낌 속에서도 크게 입을 벌려 치아 상태를 살펴보니 시큰거리는 그곳에 충치가 생긴 것 같단다. 이전에 때워놓았는데 대체 뭘 잘못 쓴 건지 그 아래가 상해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또 사랑니를 발치를 하면 좋겠단다.
사랑니 뽑아야 할까요? 따위의 질문을 또 던졌다. 뽑아도 되고 안 뽑아도 되지만으로 시작하는 설명이 이어졌는데, 사랑니는 나이가 들 수록 뽑기 어렵다는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세상에! 치아가 거기 고정이 된다고? 34살. 키즈모델 빼고 다 가능한 나이 아니었나. 많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문제는 이거라며 내 나이에 동그라미를 다섯 번이나 쳤다. 보통 사랑니는 20대 때 다 뽑아요. 이제 5년 10년 가지고 있으면 그 자리에 자리를 잡아버립니다. 그래서 20대 때 뽑는 거랑 지금 뽑으시는 거랑 난이도에 차이가 있다는 우리 선생님 앞에서 나는 어버버 하는 순살치킨이 되어버렸다. 다행인 건 뿌리가 한 개이고 방향이 바르게 났어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임에 불과했지만, 나이로 채찍을 여러 대 크게 휘둘러 맞은 나는 이 선생님이 당근 멘트를 날리자마자 애지중지 키워온 사랑니도 발치하마, 약속을 하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굳게 먹은 마음을 사랑니 발치할 때처럼 흔들리게 할 셈인지 아쉽게도 당일 치료는 어렵고 예약이 필요했다. 이 친절한 소아치과 선생님은 다다음 달에나 가능하다고. 그래도 아무렴 이미 한 번 내 입안을 본 사람이 믿음직하겠다 싶어서 (아프면 사탕이나 하다못해 마법봉이라도 주지 않겠나. 소아 치과인데) 이 선생님한테 받겠다며 고집을 부려 한 달 반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 얘기를 나중에 들은 남편은 본인이 이 치과에서 (다른 선생님일까?) 신경치료를 받았는데 눈물이 쏙 빠졌다며 나를 겁을 줬고, 치과를 바꿀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나의 굳은 결심은 사랑니처럼 굳건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를 기다려 오늘 아침 8시 반. 첫 손님이라 그런가 아니면 퐁당퐁당 연휴의 여파인가 치과에서는 그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니면 소아치과라서 그럴 수도. 주차를 하고 뛰어오느라 살짝 늦었는데, 바로 진료를 시작한다고 했다. 얼마나 치과가 오랜만이었는지 하마터면 신발을 벗고 의자에 오르려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겨우 챙겼다. 그래놓고는 짐짓 아무 일도 없던 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니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장난감이 한편에 쌓여있는 게 보였다. 치료를 잘 받으면 나한테 떨어지는 건 없나, 자동차와 작은 레고 중 무엇을 달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꿈 깨라는 듯 의자가 스르륵 뒤로 젖혀졌다.
묘하게 치과 느낌을 내 보았다.
곧바로 가운데가 동그랗게 잘려있는 초록색 면포가 얼굴과 눈앞을 가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꽉 부여잡고 귀를 쫑긋 세웠다. 입 크게 벌리세요. 입 안에 물소리, 바람소리가 났다. '으흠, 으흠-'하며 선생님이 고민하는 소리가 뒤이었다. 여덟 번 정도 입안을 지긋이 찔러대며 마취를 한다고 했다. "치료 전에 사진 좀 찍을게요." 하며 무려 플래시까지 터뜨리며 내 (썩은) 치아를 무슨 예술작품 찍듯이 찍는 소리도 들렸다. (혹시 소장용은 아니시죠?)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내 짐작이 맞았다. 사랑니가 제 자리를 마련하느라 바로 앞 치아를 밀어대서 그런 것 같은데, 어금니가 횡으로 좀 깨졌단다. 그래서 썩은 것도 같고, 시렸던 것도 같다고. 하도 깨져서 일단 지금은 처치하겠지만 나중에 신경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고. 못내 착한 척 있던 마지막 사랑니 놈이 아주 괘씸해졌다.
잇몸이 살짝 덮고 있는 관계로 살을 어떻게 잘라내서 사랑니를 빼내겠다고 했다. 빼는 느낌은 들지 않고 꾹꾹 누르는 느낌만 들었다. 이러다 입 안에서 치아가 바스러지는 거 아닌가 할 정도였다. 한참 이곳저곳 누르는가 싶더니 피인지 소금물인지 모를 짠 물이 입에 왔다 갔다. 그러나 딘 치실 같은 게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솜을 물려주더니 끝이 났다고 했다. 예? 빼신 거 맞나요? 하고 있는데 초록색 보자기가 휙 벗겨졌다. 눈부신 가운데 주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자 피 묻은 치아가 덩그러니 뽑힌 게 보였다. (그 와중에 사진대로 아주 예쁘게 생겼다.) 5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치아가 하나 사라졌다니. 허허. 그리고 다음 주에 실밥만 뽑으러 오면 된단다. 아무래도 치실이 왔다 갔다 했던 게 아니라 잇몸을 꿰매어버린 모양이었다.
마취도 안 아팠고, 꿰매는 것도 안 아팠는데 하는 생각이 드니 그 짧은 찰나에 두 달 전 일이 생각났다. 식칼에 잘려나가 응급실에 갔던 내 손가락 말이다. 당시에 응급실에서 마취하고 실로 꿰맬까요, 의료본드를 쓸까 요하는 질문에 이미 잘려 덜렁거리는 손가락에다가 마취 주사를 놓고 꿰매는 것은 하도 아플까 봐 의료본드를 썼다. 마취도, 꿰매는 것도 이렇게 안 아플 줄 알았으면 꿰매어서 확실하게 해 버릴 것을 괜히 의료본드를 썼다가 손가락이 울퉁불퉁하게 아물고 있는데, 후회가 막심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나이보다는 수월하게 뽑혔다는 말은 듣지 않았고, 어쨌든 남들은 못 볼 부위이지만 제대로 예쁘게 아물 예정이다. 12시가 채 안 되었는데도 오늘 할 일은 이제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