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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Oct 23. 2024

제법 완벽한 임밍아웃

34년 딩크 외길...'빌드업이었나' 논란

(뜻밖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이후에 가장 고민했던 건 아무래도 이 소식을 언제 알리느냐는 것이었다. 급하게 검색을 해보니 임신이라는 것에는 '안정기'라는 것이 있고, 이제 갓 5주에서 6주가 된 우리의 경우를 놓고 보자면 한 달 반은 더 남은 시기라는 것이다. 이 안정기부터는 임신 초기보다 유산의 위험성이 낮아진다는데, 보통 이때에 주변에 임신 소식을 알린다고 한다. 만 32세의 우리도 알리기 전에 유산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른바 '임밍아웃'을 좀 늦추려고도 했었다.


우리에게는 딩크라고 수만 번 외쳐도 절대 믿지 않는 남편의 처갓댁과 이마저도 모르는 나의 시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임신 사실을 알기 바로 직전 주에 아버님께 불려 가 긴 시간의 정신교육마저 받는 고통을 받았다. 그 경험에 비춰보면 '아기가 있었는데요, 없어졌습니다' 따위의 말을 하느니 유산 가능성은 0이라고 두고  '아기가 생겼습니다'만 말하는 것이 훨씬 모두의 정신 건강에 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일단 우리가 딩크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고, 5년을 버텨온 우리 어머니에게 1차 임밍아웃을 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부정의 단계를 지나 딩크의 ㄷ자만 들어도 화를 내는 그녀인 만큼,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웃음)을 선사할 것이라는 이유로 첫 희생양이 되었다. 그다음은 시댁, 그다음은 우리 아버지 정도가 되겠다. (우리 부모님은 주말부부시다.)


다만, 방법이 아주 골치였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풍선을 붙여서 깜짝 파티를 하거나 복권을 긁는 등 기상천외한 임밍아웃 방법들이 소개됐다. 유튜브에도 눈물 가득한 영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해볼 만한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고, 따라 할 만한 것이라곤 다이소 아기 풍선 정도랄까? 냅다 인근 다이소를 향해 풍선코너를 십 분이나 뒤적이다가 인터넷에서 본 풍선을 겨우 발견하고 품에 쥔 채 남편과 이리저리 상의하며 다이소를 세 바퀴쯤 돌았을 무렵, 우리는 풍선으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감동(이라 쓰고 재미라 읽어주시라.)을 연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파민 중독자인 리는 좀 더 쇼킹하고, 좀 더 감동적인(웃긴) 자극이 필요했다.


남편이 꾀를 내었다. 액자를 사서 그 안에 초음파 사진을 끼워 넣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크게 놀랍지 않을 거 같지만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뽁뽁이가 달린 택배 봉투를 2천 원인가 주고 샀다. 사진을 인근에서 한 장당 5백 원에 인화하고, 정체 모를 곳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택배 스티커를 구해왔다. 저녁 먹으러 가서, "택배 왔던데요"하고 쓱 식탁 위에 두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도착할 때쯤 어머니는 사위가 온다고 저녁을 준비 중일 거고, 준비하는 동안 딴짓을 할 수는 없으니 밥을 다 먹고 난 뒤, 차를 한 잔 하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어머니가 택배를 뜯고 말 것이라는 그런 계획이었다. 나머지도 상동.

계획은 당일 실행되었다. 내년으로 예정된 남동생의 임신 계획을 굳이 꼬투리 잡으며 딩크 이야기를 한 번 더 확인시켜 드리고, 짜증까지 듣고야 만 것은 나의 완벽한 빌드업이었다. 다만, 식사를 우리보다 조금 먼저 마친 어머니가 갑자기 택배를 뜯기 시작했다는 것은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렸지만(다른 건 아니고 동영상으로 찍기 좋은 타이밍을 놓칠까 봐서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대놓고 동영상 버튼을 눌러 컵에 휴대폰을 기대 세웠다. 얼굴이 아주 잘 나오는 바로 정면에서. 어머니의 왼쪽 코너에 앉은 남편은 폐가 튀어나올 듯한 헛기침을 연속으로 하며 (아주 티 났다.) 문자 보는 척 영상을 찍었다. (아주아주 티가 많이 났다.)


택배를 개봉하고도 어머니는 한참이나 이게 대체 어디서 온 건가, 이게 뭔가, 이게 왜 온건가를 혼란스러워했다. 택배 주소를 확인했다가 내용물을 확인했다가. (그러게 할머니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따위의 카드를 넣었어야 했는데) 하도 못 알아채시기에 내가 "할머니 축하해~"라고 하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는 "뭐야? 누구야? 네가?"를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30여 년간 딩크의 길을 외친 나는 그야말로 딩크의 표본 아니던가. 그녀가 바라던 실수 한 번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딩크 장인. 그것이 나였다. 그런데 대체 '할머니 축하해'를 외친 순간 내 목소리에 눈물이 맺힌 건 왜였는지. 좋아할 엄마의 모습을 미리 상상해 기분에 취해버린 탓이다. 엄마는 '어머어머'를 연발하며 그토록 아끼는 사위는 제쳐두고 나에게로 직행하셨다. 이게 뭔 일이냐며. 시댁도, 아버지도 차례로 비슷한 (아니 웃긴) 임밍아웃을 당하였고 그 와중에 우리 아버지는 초음파 사진마저 알아봐서 이게 외계인 사진인가 하시기도 했다. (반성하셔야 한다.) 대체 시간을 안 내주는 남동생 부부에겐 내가 당장 이번 주말 내려오라며 티를 좀 냈다. 이게 남동생에겐 먹혔는데, (안 온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막힌 추리력의 올케가 눈치를 채곤, 다다음주나 오겠다더니 당장 오겠다고 했다. 이쪽은 우리 앞에서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이들은 이날 집 청소를 하던 중 전화를 받고 '설마'하고 하루를 공쳤다고 했다. 대체 누나는 이 장난을 위해 30년을 딩크라는 빌드업을 해온 것인가 라는 상상을 하며.


모든 임밍아웃의 순간들은 영상으로 기록했다. 아쉽게도 내가 임밍아웃당한 당시나, 남편의 임밍아웃 당시 영상은 남아있지 않지만 (병원이었다.) 멍한 서로의 표정은 생생하게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 우리를 제외한 이들의 영상들은 모두 서로의 조리돌림을 위해 뜻깊게 사용되고 있다. (모두가 공유해 보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밤비(우리 아기의 태명이다)가 어느 정도 말 뜻을 알아들을 때쯤, 어느 가을에 꺼내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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