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오는 길에 시작돼야 했을 월경이 열흘 넘게 늦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큰 병이 있는게 분명하다며 이미 하루, 이틀이 지난 무렵부터 내게 산부인과를 가보라고 채근하다 지쳐있었다. 나는 하루 이틀 정도는 다 늦어져도 괜찮다며 그를 토닥였다. 하지만, 그게 일주일이 되고 열흘이 되고 보니 나마저도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직감을 했다.
생리가 늦어진 지 열흘하고도 사흘 되는 날, 결국 남편이 산부인과 전문의가 있다는 병원을 하나 찾아 보냈다. 찾아보니 다음 평점 3.6에 20분이나 차를 타고 나가야 있는 동네 산부인과였다. "여자 의사고 오래됐고 이곳 평점도 낮고..." 갖은 변명 끝에 남편은 진저리를 쳤고, 나는 평온하게 가겠노라 했다. 물론 좀더 찾아볼 심산이었지만. 검색해보니 자궁근종이나 종양이나 뭐 이런 게 있을 때에도 생리불순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너무 심각한데? 결국 일을 마치고 가보겠노라 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내일 가면 안 될까?" 차를 몰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가 눈물 쏙 빼도록 혼이 났다. 안 갈거면 안 갈 것이지, 왜 가다가 마느냐고. 시간이 안 될것을 알면서 왜 출발부터 했느냐고. 결국 나는 이날 병원에 안 갔고, 이날 밤 결국 말다툼이 시작됐다. 산부인과를 왜 안가느냐, 이러다 암이면 어쩌느냐와 같은 내용의 투닥거림이다. 한참 말다툼을 하는데 머릿속에문득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나 혹시 임신은 아니겠지?"
남편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이미 사흘 전쯤 본인이 임신 아니냐는 말을 꺼냈는데 내가 묵살했다고 했다. (내가 그랬어? 기억이 안 나.) 그럴 가능성 있는 일을 애초에 만들지를 않았는데라며 완강하게 부인했다고도 했다. 그래서 본인은 그런가보다하고 임신 가능성은 용의선상에서 배제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사랑니 발치하고 나서 벌써 3일이나 진통제도 먹고 항생제도 먹었는데 어쩌지? 엄습하는 불안을 토로하다가 결국 한 삼십분을 더 투닥대었다. 결국 남편이 말한 병원이 문을 열면 바로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남편과 어제 언제 싸웠냐는 듯 커피를 내려 마시고, 빵을 먹고 여가생활을 즐겼다. 여차하면 병원 문이 닫을 시간이 돼서야 둘다 정신을 차리고 느지막히 집을 나섰다. (그 전에 사랑니 뽑은 곳이 너무 아파서 약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혹시 임신이 아니면 먹으면 되지, 하고 나왔다.) 하늘이 왜이리 파란지. 이날따라 날이 맑고 상쾌했다. 어디 놀러가야하는데, 병원이나 가고 있다며 킬킬대며 20분간 오늘은 무엇을 하고 놀 지, 뭘 먹으면 좋을지 따위나 고민하며 산부인과에 들어섰다. 관록있는 여의사분이 있다더니, 병원은 오래된 느낌이 가득했다. 인테리어는 한 20년 전쯤의 그것이었고, 병원 곳곳에 POP광고가 이곳저곳에 붙어있는데 이 마저도 올드했다. 건강보험증을 새로 다운받는다, 아픈데는 없는데 생리가 지연돼서 뭔 일있나 검진을 하러왔다는 둥 겨우 접수를 마치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원장 한 명밖에 없는 병원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병원은 아주 고요했다.
바로 앞 순서 사람이 나오고 내 이름이 불렸다. 별 거 아니겠지, 나 혼자 다녀올게 하고 혼자 진료실에 들어섰다. 원장은 무엇 때문에 왔느냐, 기혼이냐 미혼이냐, 경험은 있냐 따위의 으레 묻는 질문을 했다. 임신 가능성 있나요? 이 질문에 결국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까요... 그러게 그것도 걱정이 되거든요. 제가 딩크인데 말이죠. 이 말을 듣더니 원장은 바로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왔는데, 으레 앉아야 할 산부인과 의자(많은 사람들이 굴욕의자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가 아니라 한의원 침대 같은 곳에 누우라고 했다. 이 병원은 서비스가 다르네, 하며 누워 있는데 원장이 들어왔다. 비슷한 초음파 기기에 뭔가 비닐 같은 것을 씌우고 옆에 달린 모니터를 보았다.
"네, 임신입니다."
마치 숙제 검사에서 100점을 받았다는 듯 명쾌하고 단호한 말투로 나의 임신 소식을 전했다. 네? 내가 외마디 비명과 같은 질문을 하자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벙벙한 나에게 그는 갑자기 쿵쿵대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심장소리입니다. 네? 내 외침은 들리지 않는 듯 원장은 설명을 계속했다. 이건 난황이고 이건 아기집이고...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뿐이었다.
아니, 제가 임신이라고요? 저 딩크인데요?
일단 몸을 추스르고 진료실로 다시 오라고 했다. 화면에서 본 초음파를 사진으로 심지어 심장소리까지 인쇄한 것을 내게 건네셨다. 임신 5주~6주쯤 됐고, 9월 초쯤에 생겼을 거라고 했다. 예정일은 내년 5월. 혼란스러웠다. 저 딩크인데요? 한 번 더 하면 이미 열번째인 그 말을 외치자, 그녀는 "그럼 조심했어야지"라는 따끔하고도 뒤늦은 충고를 했다. 얘가 어디서 생겼지? 약을 먹었는데요. 했더니, "괜찮길 바라야지"라고만 했다. (약봉투 사진을 찍어갔는데, 이걸 보여줄 겨를도 없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더 나누다가 나는 진료실을 나섰다. 이걸 대체 어떻게 전한다는 말인가. 초음파 사진을 등 뒤에 숨기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남편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인스타나 보고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상 없대."
몸에 이상은 없고 애가 있대. 차마 이 말을 못 꺼내고 있는데, 남편이 선수를 쳤다. "다 들렸어." 첫 임밍아웃마저 실패했다. 초음파를 보여주자 남편은 나와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혼돈, 그 자체였다. (돌이켜보니) 필요한 서류는 하나도 떼지 않은 채 계산만 하고 황급히 병원을 나왔다. 차안에서 초음파 사진을 남편에게 건네줬다. 우리는 "어떻게 해"만 수십번을 반복했다.
할 건 다 했다.
차를 몰아 집 인근에 도착했다. 산을 오르자고 했다. 평소라면 귀찮다 했을 남편도 머리를 비울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러마 했다. 벌써 산은 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푸르던 메타세콰이어 길이 노릇노릇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이 이파리 사이로 비쳤고, 산정상에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가 볼을 스쳤다. "어떻게 해" 고요한 침엽수림이, 잘 다듬어진 잔디가, 가끔 부는 산들바람이, 그 속에 담긴 가을 냄새가 날 것 그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며칠 환기하지 않은 방안의 탁한 공기처럼 느껴졌다. 늘 내 옆에서 걷던 남편도 이날만은 답답했는지 혼자 세 걸음 앞서 걸었다. 나는 초음파 사진을 오른손에 쥐고 뒷짐을 진 채 느지막히 따라 걸었다.
15분쯤 "큰일났네"와 "어떻게 해"를 반복해 중얼거리며 산을 올랐다. 낮은 산이라 벌써 중턱이었다. "이만하면 됐다."며 내려오자고 했다. 남편은 또 그러마 했다. 내려가는 길, 우리는 걸음 속도를 맞추었다. 초음파 사진을 군데군데 멈추어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벌써 한 달 전에 내 뱃속에 사람이 생기고 말았다는 말이지. 그걸 우리는 몰랐고. 프랑스에서 와인도 마셨고, 자전거도 이틀이나 종일 탔고, 비행기도 태웠고 했다는 말이지. 아니, 그럼 부르기뇽이 그렇게 역하게 느꼈던 게 입덧이었다는 말이야? 다행이다. 프랑스 음식 비싼데, 임신 기간에 그거 먹고 싶다는 얘기는 안 하겠다. 우리는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며 손을 맞잡았다.
추신> 꾸준히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공지없던 일주일의 휴재를 우선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위 글과 같이 34년 소나무같이 올곧던 제 딩크 생활이 강제종료되어 충격 속에 타자를 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연재부터는 아껴놓았던 이야기들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