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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Feb 26. 2022

나의 이혼이야기.14

14.안녕 할 수 없는 아버지

 그 사람은 우리 집의 왕이었다. 원래 우리 집의 왕은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흔쾌히 서울대 사위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셨다.


 아버지는 소파며 리모컨이며 심지어 '빨갱이들!'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적 견해까지 양보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다. 마치 스크루지 영감의 변화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늘 사랑받고 우대받는 왕자로 큰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고 우대받는다는 것을 알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감사할까? 인지도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크게 받았는지 지금도 모를 것이다.


 오랫만에 그 사람이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그 사람은 당연하게 친정 집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을 돌리고 아버지는 한쪽 소파에 앉거나 서서 왔다 갔다 하시거나 어머니는 그 사람의 식사를 준비했다. 매일 밤샘하는 사위에게 하나라도 더 맛있는 걸 먹이려고 늘 마트를 다녀오시곤 했다.


 그게 친정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말 그대로 귀한 늦깎이 아들이 생긴 듯이 부모님은 그 사람을 진심으로 대했다. 단 한 번도 그 사람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이나 험담조차 한 적이 없었다.


  주말이 되면 우리 신혼집으로 가곤 했는데 한 번은 눈이 많이 온 겨울에 오랜만에 집에 갔다 깜짝 놀랐다. 집에 들어가니 이글루가 따로 없었다.


 평소에도 단열이 안되어 보일러를 돌리면 등만 엄청 뜨겁고 코는 차가웠는데 그날은 아무리 보일러를 돌려도 정말 추워서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집도 멀고 해서 우리는 내 학교와 그 사람 대학원이 가까운 동대문 쪽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은평구인 친정과는 뚝 떨어지는 곳이었지만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사가 모두에게 악재가 될지는 상상 못 했다.


 난 친정에서 지내면서 십만 원이라도 생활비를 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늘 걸렸다. 말 그대로 무전취식한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얼마나 우릴 위해 신경 써주는지 아는 내 처지에선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곤 했다. 묵은 숙제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용돈도 친정에 드리지 못한 게 죄송스럽고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게 되면 꼭 아버지께 십만 원이라도 그 사람을 통해 드리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덕분에 잘 졸업했다고.






 그리고 아버지의 칠순이 다가왔다.


 아버지의 괴롭힘으로 인해 언니들은 아버지와 거의 의절하고 다들 독립해서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이셨는데 우리가 딸이란 이유로,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고 커서 사랑할 줄 모르는 이유로 우리와 어머니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아버지는 여자인 우리끼리 작당모의를 한다는 둥, 매일 술을 먹고 집에 와선 우리를 죽일 거라는 둥, 정말 공포의 나날이었다. 심지어 어머니를 향해 가스총을 쏜 적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술이 얼큰하게 취해 노래를 소리소리 지르며 집에 오는 날에는-거의 매일이었지만- 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한 두려움을 느껴 식칼이나 과도를 숨기는 게 일이었다. 


 옆 집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와도 어린 내가 울면서 '집안싸움이에요.'라고 말하면 경찰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가곤 했다. 그 당시엔 그랬다. 남의 가정사에 경찰이 끼지 않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그렇게도 아버지가 미웠다. 그리고 싫고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바라보게 되는 그는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었다. '어흥' 하면 '아이고 무서워라'라고 피해버리는 척하면 되는. 성가신 종이호랑이.


 그리고 여전히 술을 드시고 난동?을 부리시고 어머니나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건 정말 싫었지만 그 행동들이 근본적으로 외로움에서 나온 것이란 결론을 내 나름대로 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예쁨 받고 크지 못한 사람이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표현할까. 더구나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 그 옛날 사람이.

 

 아버지께 사과하러 언니들이 왔었지만 아버지는 내다보지도 않았었다. 냉랭함 속에 언니들은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그리고 우리가 동대문 쪽으로 이사한 한 달 후 아버지는 자살하셨다. 아버지가 자살하시기 일주일 전은 아버지의 칠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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