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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Feb 21. 2022

나의 이혼이야기.12

12.대학원에 가고 싶어

 그 사람은 항상 운이 좋았다. 특히 인복이 있었다. 그것도 윗사람-멘토를 잘 만나는 복.



 둘 다 첫 회사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 결혼을 하게 되어 우린 가난했다. 모은 돈도 없고 친정에서 준 1500만 원으로 어찌어찌 신혼여행이나 결혼비용을 해결하긴 했지만 신혼 가전이나 가구 등 부족한 부분을 다 카드로 사다 보니 카드값에 허덕이며 살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양가 집에 서로 안 드리고 안 받기를 하기로 했지만 우리 집에선 또 어떻게 그러냐면서 그 사람에게 양복 한 벌과 시계, 시할머님 용돈, 이바지 음식 등을 드렸다. 나는 그 흔한 화장품 세트 하나 받은 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별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집만 그렇게 챙겨드리는 게 조금 아주 조금 속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엔 그게 아주 조금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지만.


 시댁은 나에게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았다. 잘난 자기 아들, 자기 손주랑 결혼하는 것만으로 큰 복인지 알아라 라는 듯이 행동했다. 그래서 조금 속상한 마음이 점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돈이 쪼들리자 그는 돈을 조금 대출을 받아 주식을 해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정확히 그 금액이 얼만지 물어보지 않고 알겠다고 해보라고 했다.


 그 금액이 2000만 원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결국 서브프라임이 터지면서 그 돈이 다 휴지 조각이 된 후였다. 영양가 없는 친구에게서 영양가 없는 정보를 듣고 몰빵을 한 것이다. 난 2000만 원인지 몰랐다고 그 사람에게 화를 냈고 그 사람은 분명 나에게 말했다고 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런 작지도 않은 액수나 결정에 있어 항상 그 사람은 나에게 말했다고 하고 난 듣고도 까먹은 바보 멍청이가 되는 상황.


 그리고 결혼 후 1년이 지나자 4000만 원을 빌려줬던 시누이가 갑자기 2000만 원을 갚으라고 했다. 카드값에 아직도 허덕이는 우리에게 시누이는 그래 가지고 1년 뒤에 4000만 원을 갚겠냐면서 화를 냈다.


 차라리 전세 대출을 받을걸. 그때는 그런 것도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은행돈이 차라리 깔끔하지 사람 돈은 절대로 빌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시댁 돈은.




 돈에 허덕이게 되자 결혼생활은 절대 낭만적이지 못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이렇게 해서 나아지는 게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나의 회사 생활은 사장의 괴롭힘으로 인해 더더욱 힘들어졌다.


 난 나름 자율적인 영혼이라 누군가 통제하고 감시하려고 하면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하루는 회사에 갔더니 책상 배치가 다 바뀌어 있었다. 사장실에서 모니터가 다 보이는 쪽으로. 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편이었는데 그것도 가장 사장실에서 가까운 사장실 바로 앞자리가 아닌가!


 사장은 속도가 느리거나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되는 직원 뒤에 아예 의자를 갖다 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기도 했다. 난 그런 대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직을 위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매일 스트레스 속에 온갖 종류의 약봉지란 약봉지가 내 책상에 쌓였다. 내 옆에 앉은 신입은 '주임님처럼 약 많이 드시는 분 처음 봐요.'라고 놀라곤 했다.


 난 작은 중소기업이었지만 그 사람은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대기업을 다녔다. 거기다 바로 위의 사수를 잘 만나 그분은 일에 대한 것도 잘 알려 주셨지만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추천해주시면서 읽도록 하셨다.


 대기업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동기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거의 매일 매점에서 만나 과자도 사 먹고 잡담을 떠는 생활이 매우 부러웠다. 점심시간이 50분이라 밥 먹기 위해 뛰어다니는, 1시 20분이면 사장이 문 앞에 서 있는 회사에 다니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아무튼 좋은 사수를 만나 인문학적으로도, 일적으로도 성장한 그는 갑자기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일이든 시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나지만 그때 상황으로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시댁이나 친정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 혼자 돈을 벌게 되고 그런 것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 역시 사장의 감시에 지쳐 다른 곳을 이직하려고 알아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그렇게 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대학원은 대학교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그 사람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겨 집안일이나 이런 걸 할 수 있겠지 란 생각도 들고 그 사람의 2년여 뒤에 좀 더 발전한 모습을 생각하며 결국 대학원을 가는 것에 찬성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처음부터 나의 허락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은 자기 모교를 두고 자신이 배우고 싶은 과를 찾아 처음엔 K대 면접을 보았다. 난 그때 이곳의 생활에 온갖 염증과 싫증을 느껴 새로운 도시에 가서 사는 것에 몹시 기대와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되지 않았고  다시 좌절했다. 그때 얼마나 크게 좌절감이 들던지. 회사 옥상에서  안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한참을 울며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대전으로 이사를 갔고 새로운 직장도 구한 뒤었다. 그 모든 게 우르르르 무너진 것이다.


 결국 그는 서울의 다른 교수님의 스카우트 제의에 그 과를 가게 되었다. 그 교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나온 모교의 한 대학원 연구실의 사무보조 및 디자인 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대 대학원 생활은 정말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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