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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Feb 23. 2022

나의 이혼이야기.13

13.대학원생활

 그 사람은 내게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너는 정말 행운아야. 나같이 저평가된 우량주를 가져서 이렇게 컸으니까. 주식 시작해볼래? 저평가된 다른 주식들 좀 찾아봐.'



 대학원 생활은 내 생각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그 사람의 대학원 생활도 그렇고 내가 취업한 대학원 생활도 많이 달랐다. 일단 대학원 생활은 정말 빡빡했다.


 난 그 사람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사람은 운이 좋으면 새벽 4시에 집에 오거나 집에 못 들어오고 연구실에서 밤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한 대학교 사무보조도 생각과 많이 달랐다. 월급은 생각보다 작았으며 어떻게 하면 연구비를 합리적으로 빼내는 가가 중요한 업무였다.


  월급이 작아도 일적인 스트레스가 덜 하길 바래서 이직을 선택했던 건데 오히려 일적인 스트레스와 사람적인 스트레스가 더 컸다. 결국 이직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돈이라도 더 받음 억울하진 않을 텐데...' 


 면접 때 교수의 사람 좋은 웃음이 가식적으로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옆 자리 직원은 교수 방에만 다녀오면 울면서 나오곤 해서 한참을 내가 달래줘야 했다. 


  그 사람이 대학원에서 약간의 생활보조비같이 받아오긴 했지만 정말 우리의 생활은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집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날들이 많아져서 결국 우린 당분간 평일에는 친정에 들어가서 살기로 결정했다.


  친정에는 언니들이 다 독립해서 나간 후라서 내가 쓰던 방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친정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서울대 사위를 많이도 예뻐했다. 


 언니나 내가 늦은 시간 샤워하면 시끄럽다고 그렇게 화를 내던 아버지가 그 사람이 새벽 3,4시에 들어와서 씻어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새벽 2시에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해서 어머니가 살금살금 라면을 끓여주면 슬그머니 아버지는 나와서 자기도 출출하다면서 한 젓가락 달라고 해서 드시기도 했다.

 

 그나마 친정이 있어서 그 사람의 대학원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난 지겨운 집안일과 시댁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고 그 사람은 항상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아 각 잡아 다림질까지 해놓은 옷들을 입고 학교에 갔다. 


 그러나 그때 나도 몰랐지만 우울증이 심했던 것 같다. 여러 부분에서 많이 힘들어서 인지 작은 일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이직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결혼하고 아기가 없는 여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면접에 가면 대놓고 물어보는 질문. "아기는 언제 가질 계획인가요?" 


 언제 임신해서 회사를 그만둘지 모르는 나는 회사 입장에서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게 너무 싫어서 버틸 만큼 버텨보자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러다 시할아버님 기일이 찾아왔다. 기일을 앞두고 주말이라 시댁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시할아버님 기일을 이야기하다 시아버님이 대뜸 "이번에 저녁은 니가 준비해라." 나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어버버 하며 그 사람의 눈치를 봤지만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일인데 일 다니는 나에게 굳이 시할아버님 추도예배 상을 차리라고 하시다니... 백수인 자기 딸을 두고... 나는 뭔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하니 그 사람은 이미 대학원 생활에 지쳐 그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 누가 차리겠냐, 여동생이 차리겠냐, 80넘은 할머니가 차리겠냐, 여동생이 차리면 되지, 걔가 차릴 애냐, 뭐 그런 식의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난 분하고 분해서 절대 차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평소에는 밖에서 먹고 들어왔으면서 왜 이번엔 집에서 차려서 먹겠다는 거야?! 백수인 자기 여동생은 안 차릴 애면, 그럼 직장 다니는 나는 상 차릴 애인 건가?' 생각할수록 기분 나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혼자 늦은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께 이러이러해서 상을 차리라고 한다, 하지만 난 절대 안 할 거다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내가 생각보다 더 분하고 서러워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며 눈물을 닦는데 어머니가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음식 좀 해서 챙겨놓을 테니까 가져가서 차려드려."


 그 말에 난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엄마가 그 음식을 왜 준비하냐고, 엄마가 음식 해놔도 난 절대 안 가져갈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음식 하기만 해 보라고! 절대 하지 말라고. 


 그리고 방에 와서 엉엉 울었다. 왜 우리 어머니가 자기 조상도 아닌 딸의 시할아버님 추도예배 저녁상을 차려야 하는지. 우리 집은 제사까지 지내서 가뜩이나 어머니는 평생 고생했는데.


 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날 야근하기로.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난 그날 야근하니까 알아서 드시라고. 끝나고 최대한 일찍 가겠다고. 그것은 내 최초의 반항이자 분노의 표현이었다.


 결국 그날 시댁은 외식을 했고 회사에 있다가 나는 시댁이 다 모인 식당에 식사가 끝날 때 즈음 도착했다. 늦게 온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추도예배를 드리고 다시 집으로 왔다.  


 묘한 승리감과 성취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사람과 시댁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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